4GospelChurch 박경호목사 이사야 28장 [유대교가 천국으로 인도하는데 실패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천국의 기초돌이 되셔서 다양한 구원의 역사를 나타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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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28

[유대교가 천국으로 인도하는데

실패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천국의 기초돌이 되셔서

다양한 구원의 역사를

나타내 주십니다]



1절입니다.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사실 이 선지서는 우리말로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너무 오번역이 많기 때문입니다. ‘woe’ ‘화로다입니다. 그러니까 지옥이죠. 누구냐면 ‘the crown of pride’ ‘교만의 면류관에게입니다. 누구냐? 에브라임의 술 취한 자들입니다.

 

에브라임은 산당이 많은 곳이죠. 유대에는 성전이 있습니다. 성전에서만 구원이 존재하지 산당은 사실 구원이 희박한 곳입니다. 그러니까 산당도 예배처지만 산당 예배는 법궤가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구원이 어렵기 때문에 항상 구원은 예루살렘과 유다 쪽으로 나온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예배를 드리지만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그런 것입니다. 현재 있는 북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지금 잘못된 예배를 드리는 어떤 사람을 알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glorious beauty’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이 ‘fading flower’ 사라지는, 지는 꽃입니다.

 

그들이 영광이 있습니다. 그 속에도 영광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는 꽃입니다. 원래 꽃이 지면 안 됩니다. 꽃이 지면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은혜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세계에서도 꽃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는 꽃입니다. 나중에 구원이 안 됩니다. 그래서 일시적인 영광에 취해서 여기 은혜롭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구원이 안 되기 때문에 은혜가 아닙니다. 그래서 지는 꽃, 분명히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이 있는데 그들이 지는 꽃인 것입니다.

 

어디에 있느냐? ‘the head of the fat valleys’ 아주 비옥한, 기름진 골짜기의 머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런 예배를 인도하는 자들 가운데 우두머리들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드리는 사람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 인도자에 대한 것입니다. 어떻게 예배를 인도하느냐? ‘valleys’입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입니다. 골짜기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골짜기와 산에 대한 게 많이 나오죠. 골짜기 하면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을 못 만나는 예배, 또는 만난다 할지라도 ‘fading flower’, 그러니까 지는 꽃에 해당되는 순간적인 은혜만 임하는 곳을 말합니다. 그래서 천국에는 이르지 못하게 하는 예배를 말합니다.

 

그런데 ‘fat’ 비옥한 것입니다. 기름진 것입니다. 무엇일까요? 이곳에 돈이 많고 헌금이 많고 부요한 것입니다. 부흥해서 굉장히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fat valleys’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부흥되면서도 돈이 많은 그런 예배처에서의 우두머리들의 꼭대기입니다.

 

‘overcome with wine’ 와인으로, 포도주로 넘쳐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포도주는 향락 또는 인간의 흥미로움과 인간적인 기쁨, 그것이 와인입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있는데 인간적인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납니다. 그래서 참된 예배처가 아니더라도 꽃이 있고 와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것 같습니다. 거기다가 와인, 포도주, 성령의 은혜가 있습니다. 이게 참 재밌습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문제는 mountain이 아니라 valley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볼 때 valley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구원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절입니다.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 물이 넘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behold’ 보라 여호와께서는 ‘mighty’ 강력하고 능력이 많은 ‘strong one’ 강한 것을 갖고 계시는데 ‘which’ 어떤 것이냐? ‘as a’ 무엇 같다는 것입니다.

 

‘tempest of hail’ 우박의 폭우와 ‘destroying storm’ 파괴적인 폭풍과 강력한 물의 넘침, 홍수를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느냐? 땅에다가 손으로 던지는 것입니다.

 

지금 그렇게 영광스럽게 보이는 예배를 드리는 장소인데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대해서 심판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우박의 폭우와 멸망시키는 폭풍과 홍수로 결국은 심판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교만의 면류관,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은 발에 밟힌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지옥을 갈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막판에는 비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의 운명에서 맨 막판에 어떻게 되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순교도 있지만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밟히는 그런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그의 영화가 쇠잔해 가는 꽃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 따서 먹으리로다

 

그 기름진 골짜기의 꼭대기에 있는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이 곧 지는 꽃이 될 거라는 것입니다. 무엇처럼? ‘hasty fruit’입니다. hasty성급한, 서두르는입니다. 열매입니다. 열매가 아직 안 된 것입니다.

 

열매가 되어야만 구원받는데 열매가 안 된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만들긴 만듭니다. 변화시키긴 변화시킵니다. 그런데 구원에는 도달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옳지 않은 예배도 우리를 많이 바꿔놓습니다. 문제는 구원에는 도달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처가 똑같은데 거기도 찬송부르고, 회개하고, 말씀이 좋은데 왜 안 되느냐? 이유가 무엇이냐면 ‘hasty fruit’입니다.

 

열매가 덜 되어서 천국에는 도달이 안 되는 상태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어렵습니다. 변화가 되긴 되는데 구원까지가 그 기준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로서는 답답한 노릇입니다. mountainvalley를 구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여기도 열매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before the summer’ ‘여름 전에입니다. 여름이 되면 완전히 익는데 덜 익은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자가 볼 때 아직 그의 손에 그것이 있을 때 그것을 먹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누가 먹을까요? 하나님일까요? 아니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안 드십니다. 하나님은 덜 익은 것을 안 먹습니다. 누구입니까? 마귀입니다.

 

우리가 변화되었다구요? 온전히 안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안 받습니다. 온전함이어야 받는데 덜 익으면 마귀가 먹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남은 자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남은 자에게’ ‘residue’ 남은 자입니다. 구원을 잃지 않고 남은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백성 가운데 남은 자만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2만 명이 따라다녔죠. 크게 군중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120명만 구원받습니다. 그 몇만 명이 모여서 떡을 먹었는데도 남은 자만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의 남은 자에게 무엇이 있느냐? 영광의 면류관이 있을 것이고 아름다움의 왕관이 있을 거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관이죠. 왕관이 씌워지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영이 되시며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

 

그 심판의 자리에 앉아있는 자에게 심판의 영이 된다는 것입니다.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있다? 구원받으면 하나님의 판결권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옳고 그름을 누가 알 수 있나요? 구원받아야 옳고 그름을 알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셔야만 정확히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to the gate’입니다. gate, 문은 다 성문을 말합니다. 대부분 예루살렘 성문을 말합니다. 성문에 ‘turn the battle’입니다. ‘성문으로까지 역전하다입니다. ‘전사가 뒤집어지다입니다. 성문을 향하여 전사가 뒤집어지는 자들에게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성문은 구원입니다. 이제 성문에 멀어져서 구원을 못 받다가 어떻게 또 은혜가 와서 다시 구원으로 들어가는 역전하는 것, 그에게 하나님이 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시적인 표현이죠.

 

나는 말이야, 힘이 될거야. 누구에 대해서? 예루살렘 성문을 향해서 드디어 역전해서 달려오는 자들에게 힘이 될거야라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그리하여도 이들은 포도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그러나 그들은입니다. 그들은 아까처럼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wine’ 포도주로 실수를 하였고 독주로 길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포도주는 은혜로운 성령의 역사입니다. 또는 세상적인 감흥입니다. 독주는 어둠이 주는 힘입니다. 어둠이 주는 감흥들, 어둠의 감흥들에 싸이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서 성령의 역사가 있긴 있는데 동시에 독주를 통해서 세상적인 악한 것이 동시에 동발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과 선지자가 독주로 말미암아 실수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이런 곳에서 예배드리는 예배 인도자가 제사장입니다. 선지자는 이런 인도자만이 아니라 영적인 세계를 끌어당기는 선지자입니다.

 

잘못된 예배처에서도 선지자가 있죠. 거짓 선지자가 있고 잘못된 거짓사도가 있습니다. 거짓교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들도 독주를 마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됩니까? ‘포도주로 삼키며세상적인 것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흥미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독주를 통해서 길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길을 잃어버립니다. 그들은 심판할 때 비틀거린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판단력은 흐려지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다윗도 나중에 헷갈려져서 압살롬을 막 좋아하고 이게 이상합니다.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비틀거리는 것입니다. 여자가 미혹하니까 넘어가 버리고 머리가 맛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토한 것은 무엇입니까? 먹던 것을 먹는 것입니다. 죄를 또 짓고 또 짓는 것입니다. 죄를 반복적으로 짓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그들이 지식을 누구에게 가르치는가?’입니다. 분명히 그들은 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 인도자로서 지식을 가르치죠. 그런데 누구에게 가르치는 건가?’ 지금 보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그가 ‘doctrine’입니다. doctrine은 교리, 또는 성경에 대한 요약, 또는 어떤 성경의 명제들입니다. ‘누구에게 doctrine을 이해시키게 하겠는가?’입니다. ? 잘못된 가르침인데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하느냐? 우유를 먹다가 이유하는 어린애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또 누구에게 미혹하느냐? ‘drawn from the breasts’ ‘가슴으로부터 당겨서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나긴 거듭났습니다. 거듭난 삶입니다. 거듭났는데 잘못된 가르침으로 그들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어리니까 분별력이 없습니다. 어디까지? 이유한 자들입니다. 이유하면 상당히 신앙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애기들은 젖먹습니다. 말씀의 딱딱한 것을 먹을 때부터 그때까지 미혹된다는 것입니다.

 

거듭나기 전에 있는 사람들도 미혹되고 거듭난 자들도 미혹되고 우유 안 먹고 딱딱한 것을 먹을 때, 이때도 사도바울은 말씀을 먹였습니다. 여기에서는 말씀을 먹일 단계에서 미혹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미혹되느냐? 거듭나기 전, 또 거듭난 이후에 젖 먹을 때 미혹됩니다. 또 젖을 띄고 말씀을 먹을 때도 미혹된다는 것입니다. 거듭난 자들이 여기에 미혹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구원이 아닙니다. 미혹되면, 잘못되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자들이 미혹되어서 다 실족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교훈에 교훈이 더할 거라는 것입니다.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또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line upon line’입니다. line은 행간, 글의 한 줄입니다. 한 줄 한 줄 계속 새로운 말씀과 새로운 가르침으로 계속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내용이 되게 많은 것입니다.

 

어떻게 하느냐? ‘here a little’ 여기 조금, ‘there a little’ 저기 조금입니다. 여기서 누가 한 설교를 또 가져와서 설교하고, 저기서 한 신학박사 얘기를 가져와서 설교하고, 자꾸 설교가 많아집니다.

 

그래서 설교 홍수 시대에 살고 있죠. 현재 있는 유튜브, 방송 설교가 넘쳐납니다. 수억 개의 설교가 막 쏟아지는 것입니다. 모아서 쏟아지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자기 백성에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누가? 잘못된 예배처에 있는 제사장과 선지자와 인도자들입니다. 잘못된 입술은 영적인 것입니다. 이게 잘못되었는데, 영적으로 입이 병신인데 하는 것입니다.

 

입이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고 병신이 있는데 병신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빨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가르침을 또 받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들에게 그가 말했다는 것입니다. ‘this is the rest’ 이것이 안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너희들은 지친 자에게 안식을 줄 수 있도록 한 것이다입니다. ‘this is the refreshing’ 이것은 상쾌함이라는 것입니다.

 

rest는 구원입니다. 원래 이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해야 하는데 안식을 주고 상쾌함, 구원받으면 영적인 상쾌함이 있죠. 그러나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구원에 의한 안식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에게 있었는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또 더하고, 행간에 행간을 또 더하여서 여기 조금, 저기 조금 하는데 그들은 갈 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서 뒤로 넘어질 거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러질 것이고 올무에 걸릴 것이고 잡혀간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잡혀가느냐? 마귀에게 잡혀가는 것입니다. 누가? 그들과 그들의 교훈을 받은 자들이 잡혀간다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이러므로 예루살렘에서 이 백성을 다스리는 너희 오만한 자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scornful men’ ‘너희 비웃는 자들아입니다. 무엇을 비웃느냐? 참복음을 비웃는 것입니다. 거꾸로입니다. 거짓이 항상 참을 비웃습니다.

 

인간은 굉장히 어리석습니다. 인간의 지성은 거의 곤충 수준입니다. 인간은 참 어리석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우리가 굉장히 똑똑하다고 생각하죠? 아닙니다. 우리는 굉장히 어리석습니다. 왜냐구요? 인생의 흐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가 어떤 것을 선택하거나 할 때는 참 잘했다고 느낍니다. 박수도 받고,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천국과 지옥이 가까올 때 그때 제정신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영도 이미 끝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인생에서 후회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게 참 진짜 어리석습니다. 뒤로 돌아서면 ! 그때 왜 그랬을까하는 후회거리가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냐? 인생의 후회거리야 어차피 지나갔으니까 문제없습니다. 문제는 후회거리 가운데 영원한 생명이 있는 후회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처가 얼마나 중요한데 그것을 그렇게 엿장사한테 바꿔먹습니까?

 

그것이 인간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배처가 엄청 중요합니다. 인생을 바꿔놓는 것입니다. 인생의 운명을 바꿉니다.

 

운명이라는 게 어디서 결정나느냐? 거기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운명을 모릅니다. 사람은 지금 좋으면 좋은 줄 압니다. 인간은 미래를 모릅니다. 사람은 오늘만 압니다. 그래서 미래의 어떻게를 생각 안 합니다.

 

다 기뻐하고, 좋아하고, 여기서 또 사역도 하고, 돈도 벌고, 인정받고,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단면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 자기를 참으로 여기죠. 다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에 가면 참을 거짓으로 여깁니다.

 

? 내가 왔으니까 거기가 참이 되는 것입니다. 참과 거짓이 사실은 내가 어디 있느냐에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냐? 나중에 시간 지나면 아는 것입니다. 그것도 몇 개월, 1년 후에 아는 것입니다. 그때 아는 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죽은 다음이 또 문제입니다. 그 운명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런 귀한 것을 쉽게 결정합니다. 기도도 한번 안 해봅니다. 그냥 기분 나빠서, 어때서 하고 단편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그것이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지옥도 문제가 되고, 운명도 안 좋아지고, 그러니까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너무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이런 것들이 안 보이죠. 영적으로 valley가 보이고 산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처럼 이 말씀은 다 이루어지는데 ‘scornful men’입니다. 거짓은 참을 비웃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거짓은 참을 늘 비웃습니다. 너희 비웃는 자들아, 어떤 자들이냐? ‘예루살렘에서 이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아입니다.

 

이들이 누구냐? 예배의 중심지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예배의 중심부에 있는 자들, 기독교의 중심세력입니다. 유대도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중심에 있는 자들인데 이들이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답이 없습니다. 신학대에 갔는데 신학대에서 제일 우두머리가 잘못 가르칩니다. 거기 들어갔는데 어떻게 할 수가 있나요? 나올 수도 없고 방법이 없습니다.

 

기독교에 왔는데 기독교의 최고 고수가 잘못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거 어떡합니까? 내가 깨달을 수도 없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책들을 읽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제가 책을 읽은 이유였습니다. ‘어디가 진리가 있는 건가?’

 

왜냐하면 사람들이 설교가 다 다르고 주장이 다 다르고 구원이 다 다릅니다. 그러니까 막 독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연속으로 한 600권쯤 읽으니까 드디어 깨닫게 됩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 가지를 깨닫습니다.

 

책은 다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책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책은 완전히 다 미혹물들이구나’, ‘인간이 무엇을 써도 다 미혹이구나그것이 자서전이든 전부 다 그게 미혹입니다.

 

무엇이 진리이냐? 그래서 제가 그다음부터 드디어 성경을 쓰기 시작합니다. ‘성경을 써보자컴퓨터에다가 쓰기 시작합니다. 이게 진리 같은데 잘 깨달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영어 성경을 두 번을 정독합니다. 그래도 안 됩니다. 뭔가 정확하지 않으니까 헷갈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 원어는 정확한 거니까 내가 한번 공부해보자해서 제가 아주 옛날에 여기를 오게 된 것입니다. 와서 원어를 가르치는 데서 책을 삽니다. ‘책 다 주세요

 

그래서 히브리어 원어, 히브리어 성구사전, 헬라어 원어, 헬라어 성구사전, 그리고 발간된 책들도 한 몇백 권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 주세요하고 읽기 시작합니다. 책을 읽기 시작하는데 원어에 눈이 뜨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책들이 몇백 권 됩니다. 막 읽는데 , 역시 맞구나. 진리는 성경밖에 없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밖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냐? 성경을 다 다르게 해석합니다.

 

그래서 원어를 내가 한번 번역해보자!’해서 그때 무렵에 꿈을 꿔서 꿈에 4복음서를 말씀하셔서 히브리어는 안 하고 다 줘버립니다. 다 주고 드디어 번역하는데 한 자 한 자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 내가 이제까지 배운 것들이 잘못되었구나

 

성경을 내가 배워보니까 이제까지 잘못된 걸 배워왔네그래서 헬라어 원어로써, 말씀으로써 내가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니까 구원이 되게 어려운거네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 믿었구나

 

그래서 이제 번역이 2010년에 마쳐지죠. 그 직전에 제가 만남교회를 가게 되는 것입니다. ‘, 구원이 어려운 것이구나

 

이 진리라는 것이 무지 어려운 거였습니다. 진리가 무지 어려운 것을 제가 깨달은 것입니다. ? 문제가 거의 다 가짜입니다. 예를 들어서 진짜가 좀 숨어 있으면 모르는데 숨어 있지도 않습니다. 아예 진리가 없습니다. 제가 느낀 것입니다.

 

? 제 생각에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는 데가 없습니다. 다 각색되고 만들어져서 나와서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 천국 못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있는 그대로 내가 직접 공부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배우니까 쉽게 말하면 내가 딴사람이 된 것입니다. 생각 자체가 현재 있는 사람과 다르게 된 것입니다. ? 저는 배우지도 않고 원어를 독학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생각 자체가 다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나를 믿어주랴하고 나는 혼자의 삶을 결정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항들을 아무도 안 믿어줍니다. 우리가 얼마나 다른 게 많습니까? 그러니까 결정했는데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개척하게 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저는 영적인 별종이 된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너무나 거짓이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15절입니다.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

 

너희가 말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과 계약을 맺었다그렇죠. 실제로 그 잘못된 가르침은 우리를 죽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력이 없습니다. 또 우리는 지옥과 협의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 사상과 가르침들은 죽음과 지옥으로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overflowing scourge’입니다. ‘scourge’라는 단어는 심판, 때림, 채찍, 하나님께서 잘못에 대해서 악한 자에게 내리는 벌 쪽입니다. 이제 넘치는 그 scourge가 지나갈 때 우리에게 오지 않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과 협약했고 지옥으로 협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마음속에는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지 않아라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 옳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거짓 아래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숨겼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반대말은 거짓입니다. 그러니까 진리가 아닌 것으로 자기를 숨긴 것입니다.

 

이들은 거짓에 스스로 속은 것입니다. 거짓에 속았기 때문에 그것을 자기가 피난처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기초로써 시온에 둔다는 것입니다. 한 돌, 예수님이시죠. 시온은 낙원천국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도저히 안 되겠다너무나 사람들이 빗나가니까 예수님을 드디어 낙원천국에 돌로써 주셨는데 어떤 돌이냐?

 

‘tried stone’입니다. 시험한 돌은 오번역입니다. tried시련받은입니다. try시련시키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련받았죠. 시련받은 돌,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a precious corner stone’ 아주 귀중한 모퉁이돌입니다. ‘a sure foundation’ ‘확실한 기초로써입니다. 어떤 기초일까요? 천국에 이르게 하는 기초입니다. 기초로써 예수님을 세우신 것입니다.

 

어떻게 세웠느냐?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깨버리고 세우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확실한 구원을 위해서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는 ‘shall not make haste’입니다. 아까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서두르는, 성급한입니다. 아직 열매가 안 된 상태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아까처럼 거짓된 믿음을 통해서 형성되는 hasty fruit이 안된다는 얘기입니다. 중간에 덜 익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으면? 예수님을 믿으면.

 

왜일까요? 예수님은 구원에 이르도록 우리를 자라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거짓된 교회는 자라긴 자라게 합니다. 그런데 자라긴 자라는데 오히려 거꾸로 미혹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덜 자라게 만듭니다. 이것은 온전히 자라서 온전한 과일이 되는 것입니다.

 

17절입니다.

나는 정의를 측량줄로 삼고 공의를 저울추로 삼으니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하며 물이 그 숨는 곳에 넘칠 것인즉

 

‘judgment’ 정의, 심판이 ‘to the line’입니다. line은 줄입니다. 건축할 때 줄이 있으면 그 줄에 맞춰서 집을 짓죠. 측량줄, 다림줄입니다. 정의가 줄까지에 내가 놓을 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역사하는 사람은 그 정의로움이 구원에까지, 기준에 도달된다는 것입니다.

 

또 의로움이 ‘to the plummet’입니다. 이것은 세로로 내려오는 다림줄입니다. 줄에 맞춰서 집을 짓는 것입니다. 줄 만큼 정확한 게 어디 있습니까? 무게 추가 있으면 그게 정확하죠. 그러니까 맞춰서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을 지을 때 그것에 맞춰서 온전한 집이 지어지는 것입니다. 누가 하느냐?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의로움이 선에 맞추도록 그렇게 우리를 성장시킨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구원이라는 데 필요한 의로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의로움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자기 고백이 아닙니다. 그냥 선까지 맞춰져야 합니다. 선에 도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sweep away’입니다. ‘날려보내다, 소탕하다입니다. 드디어 참복음이 거짓복음에 거꾸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참복음이 거짓복음에 역사해서 참이 흘러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들이 숨은 장소에 넘쳐난다는 것입니다. ‘hiding place’는 무엇입니까?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복음의 물결이 지금 넘쳐남을 말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부터 참복음이, 진짜가 예루살렘부터 시작해서 전 세계에 번집니다.

 

그래서 구원의 소식이 많아진 것입니다. 그전에는 구원이 힘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퉁이의 돌이 되셔서 예수님은 구원을 일으키는 원인자입니다. 구원은 뿌리가 인간에게 있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에게 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으면 그 뿌리가 예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낙원천국에서 corner stone이 되셔서 그 줄까지 만들어서 우리를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18절입니다.

너희가 사망과 더불어 세운 언약이 폐하며 스올과 더불어 맺은 맹약이 서지 못하여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 때에 너희가 그것에게 밟힘을 당할 것이라

 

너희가 사망과 맺은 계약이 ‘disannulled’ 취소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예배처에 있는 사람들이 드디어 참복음으로 말미암아 변화되어서 죽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의 지옥과 맺은 협약들이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지옥으로 인도 안 하고 다시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overflowing scourge’ 넘치는 심판, 채찍이 올 때 너희들은 다시 그것에 밟힌다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그것이 지나갈 때마다 너희를 잡을 것이니 아침마다 지나가며 주야로 지나가리니 소식을 깨닫는 것이 오직 두려움이라

 

그것이 지나갈 때마다오번역입니다. ‘go forth’ ‘그것이 나올 때입니다. 그것이 나올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너를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어디로 데려갈까요? 그것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데려갑니다.

 

이것은 내가 참복음에 의해서 변화받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올 때 그것을 못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거기에 대해서 심판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지나가며 밤낮 지나가며 그 소식을 참복음의 이해에 대해서 ‘vexation’입니다. 소식을 듣고도 패닉이 되는 것입니다. 드디어 참복음을 들어보니까 가짜구나하고 영적으로 패닉이 오는 것입니다.

 

20절입니다.

침상이 짧아서 능히 몸을 펴지 못하며 이불이 좁아서 능히 몸을 싸지 못함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침대가 있는데 몸이 더 큽니다. 안 맞죠. ‘내가 안 맞는걸 갖고 있었구나’, ‘가짜 복음을 갖고 있었구나이불을 덮었는데 이불이 몸보다 짧습니다. ‘내가 이거 가지고 안되는 거구나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또 알아내서? ‘understand the report’입니다. 그 소식, 진짜 깊은 복음의 소식을 들을 때 그때 가서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이 먹어서 버려질 때, 그때 깨닫는 것입니다. ‘, 아니었구나그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은 그것을 나중에 알게 됩니다. 언제? 넘치는 scourge가 올 때 아는 것입니다. scourge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심판이 올 때 아는 것입니다.

 

그때는, 심판은 이미 늦은 것입니다. 그전에 심판이 없을 때 믿음을 지켜야 하는데 심판이 오면 그때 깨닫는 것입니다. ‘, 내가 짧은 복음이었구나우리가 지옥 가면 그때 알죠. ‘내가 잘못 믿었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걸 나중에 압니다. ‘이게 잘못된 복음이었구나그러니까 어떻게 할 수가 있나요? 참을 비웃었는데 알고 보니까 자기가 거짓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 결과가 증명하니까.

 

참이면 당연히 천국에 올라가죠. 그런데 지옥 가보니까 아는 것입니다. ‘, 내가 짧은 거구나. 이게 짧은 복음이었구나그래서 사람들이 그때 안다는 얘기입니다. 지금은 모릅니다. overflowing scourge, 심판이 와야 아는 것입니다.

 

죽음일 수도 있고 어떤 질병일 수도 있고 그때 와서 아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많은 신정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짜인지 진짜인지 알게 됬죠.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로 나중에 아는 것입니다.

 

21절입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브라심 산에서와 같이 일어나시며 기브온 골짜기에서와 같이 진노하사 자기의 일을 행하시리니 그의 일이 비상할 것이며 자기의 사역을 이루시리니 그의 사역이 기이할 것임이라

 

대저 여호와께서 브라심 산에서와 같이 일어나시며브라심은 깨뜨리다입니다. 바알브라심이라는 게 있죠. ‘바알을 깨뜨리다입니다. 여호와께서 바알을 깨뜨리는 그 산에서 내가 ‘rise up’ 일어날 거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예배처에서 참된 말씀으로 일어날 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분노할 거라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in the valley of Gibeon’처럼입니다. 기브온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적들을 막 치는데 적들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 하루로 안되니까 태양아, 멈춰라!’라고 한 데가 기브온 골짜기입니다. 적들을 다 섬멸합니다.

 

하나님께서 잘못된 복음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춰주시는데 하나님께서 분노 가운데 그들을 다시 또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사역을 할 거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역이냐? ‘his strange work’ 이상한 사역입니다. strange이상한, 별난, 다른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우리가 볼 때는 이상하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게 보편성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 역사가 나타날 때 좀 주저주저하는 것입니다. ‘이거 진짜 하나님인가?’ ? 참된 복음이라는 게 하나님은 항상 이상한 것입니다. 이상하니까 이거 진짜인가 가짜인가하고 주저주저하는 것입니다. ? strange work이기 때문입니다.

 

‘bring to pass his act’ 자신의 행동으로 도달하는 것입니다. 어떤 행동이냐? ‘strange act’ ‘이상한 행동으로입니다. 하나님의 행동 양식이 조금 이상하십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지혜로는 이것이 간파가 안 됩니다. 하나님의 행동 양식이 조금 별납니다.

 

정말일까요? 정말입니다. 역사가 증명했습니다. 이제까지 참된 복음은 항상 별났습니다. 카타콤에서 나오면 되는데 갇혀서 거기서 지내질 않나, 이단 소리 들으면서 핍박받질 않나, 내용들이 다 별납니다. 정상이 없습니다.

 

22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오만한 자가 되지 말라 너희 결박이 단단해질까 하노라 대저 온 땅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을 내가 만군의 주 여호와께로부터 들었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오만한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 ‘너희의 결박이 강해지지 않기 위함이다우리가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때 버티죠. ‘저거 아니야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얘기입니다. 결박이 결국 지옥 가죠. 결박을 벗기 위해서 빼야 하는데 안 빠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들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들었느냐? ‘consumption’입니다. 이것은 소모, 끝남입니다. ‘consumption’이라는 단어는 이런 것입니다. 연탄이 있으면 다 타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다 먹어치우는 것, 없애는 것입니다.

 

공룡이 다 파괴시키는 것, 없애버리는 것, consumption입니다. 이것을 멸망으로 번역하는데 사실은 멸망으로 번역하는 건 좋은 건 아닙니다. 멸망이 아니고 이것은 그냥 소모성 멸망입니다.

 

어떤 멸망이냐? ‘온 지구, 온 땅에 대하여 결정된입니다. 현재의 자연계가 하나님의 consumption으로 결정된 것입니다. 자연계는 이제 나중에 다 없어집니다. 그래서 온 땅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멸망,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멸망? 영원한 멸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이 있으면 이 땅에서는 시간적 멸망입니다. 그런데 이 땅이 없어져 버립니다. 시공이 없는 멸망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에 대해서? 그들에 대해서. 잘못 인도한 예배 인도자들, 잘못된 선지자들, 잘못된 교사와 제사장들, 그들에 대해서 따르는 추종자들에 대해서 있다는 것입니다. ? 그다음부터는 이제 영원합니다. 끝나는 게 아닙니다. 영원한 멸망으로 지금 졌다는 것입니다.

 

23절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24절입니다.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쉬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자기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plowman’ 땅을 가는 자입니다. ‘땅을 가는 자가 하루 종일 씨뿌리려고 땅을 갈겠느냐?’ 그렇죠. 기경이 목적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목적이 기경이 아니라 씨를 뿌리는 것인데 기경하겠느냐?’입니다.

 

그리고 그의 땅을 개간하고 덩어리들을 부수는 것만 하겠느냐?’입니다. ‘씨를 뿌려서 열매를 맺는 게 목적인데 딴것만 하겠느냐?’ 하나님께서 구원이라는 과정 가운데 필요한 첫 번째 과정인 게 개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이 회개입니다. ‘땅을 갈고회개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차이가 있는 것은 마음의 차이입니다. 마음이 회개가 되면 마음이 갈려진 것입니다. 세례요한도 이것 때문에 왔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마음에서 일어나는데 이 마음이 안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기경시키는 것입니다. 기경시켜서 말씀을 떨어뜨려서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가 회개입니다. 회개하는데 오래 걸립니다. 또 갈굽니다. 목적이 아니죠. 목적은 열매까지입니다.

 

참복음은 무엇이냐? 참복음은 처음에 회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경합니다.

 

25절입니다.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아니하겠느냐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소회향은 식물 이름인데 민들레과 식물이라고 합니다. 소회양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고 밀을 던지며 지정된 보리를 또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장소에 귀리를 던진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씨앗을 던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드디어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드디어 말씀을 받습니다.

 

26절입니다.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을 보이사 가르치셨음이며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discretion’ 신중함, 분별력을 지도한다는 것입니다. 뭐하기 위해서? 그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바른 가르침입니다.

 

회개가 안 되면 가르침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회개가 되어야만 가르침이 의미가 있습니다. 아주 신중한, 그리고 분별력 있는 말씀을 드디어 던지는 것입니다.

 

27절입니다.

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며 대회향에는 수레 바퀴를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며

 

소회향은 탈곡기로 탈곡하지 않고입니다. 탈곡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죠. 아마 키식 탈곡기인지 모르겠지만 추수할 때 탈곡기로 안 한다는 것입니다. 추수는 구원입니다.

 

뿐만 아니라 ‘a cart wheel’ 마차 바퀴가 대회향에 대해서 굴러가는 것입니다. 바퀴가 굴러가면 다 깨져서 나오는데 이렇게 안 한다는 것입니다. 대회향을 추수할 때 마차 바퀴를 안 쓴다는 것입니다. 쓸 게 있긴 있는데 안 쓴다는 것입니다.

 

안 쓰고 어떻게 하느냐? 그 소회향은 ‘staff’입니다. 막대기인데 어떤 막대기이냐? staff는 몽둥이 쪽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가지로 만든 막대기입니다. 산에 올라가다가 가지가 부러진 것, staff입니다. 그런 staff로 쳐서 추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있는 식물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향과 근채를 십일조 드린다고 하는데 그런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이 심었던 그런 식물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하고는 관계가 없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식물들을 심는데 아주 흔한 식물들인데 이것을 할 때 탈곡기도 쓰지 않고 마차 바퀴도 쓰지 않고 그냥 두들겨서 한다는 것입니다. ‘cummin’ 막대기로 대회향을 추수한다는 것입니다.

 

28절입니다.

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

 

‘Bread corn is bruised’ 곡식은 부순다는 것입니다. 으깬다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밟는 것입니다. 추수할 때 상하게 한다’, 이것이 곡식을 탈곡할 때는 또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탈곡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마차바퀴로 그것을 깨는 것만이 아니라 또 마병을 통해서 그것을 으깨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추수할 때 양식이 여러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열매가 되었습니다. 되었는데 우리를 추수할 때 어떤 사람은 탈곡기로 쓸 수가 있고 어떤 사람은 마차 바퀴로 추수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으깰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이 일어날 때 현상이, 방법이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구원 방법의 다양성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시킬 때 고난으로 구원시키고, 어떤 사람은 말씀으로 구원시키고, 다양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각 열매마다 다르게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회향은 소회향대로, 대회향은 대회향대로, 그리고 귀리는 귀리대로 다르게 해서 구원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29절입니다.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이것도 만군의 여호와로부터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감동들, 지혜는 놀랍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역에 있어서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결국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지금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이 참교회가 근거가 어디서 되느냐? 구원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출발이 하늘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출발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있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이 안 일어납니다. 가짜, 거짓된 예배만 드릴 뿐이지 안 일어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들어오시면 그때 드디어 우리가 탈곡되어서 어떤 사람은 귀리, 누구는 쌀, 누구는 밀, 누구는 보리, 해서 하나님 앞에 천국 창고에 모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열매로 이해하시고 곡물로 이해하십니다. 추수가 구원이고 거둬들임, 수장됨, 이것이 영생입니다. 이제 죽을 때 결정되죠. 여전히 열매를 맺으면 구원받고 열매를 얻은 순간이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아도 유지가 어렵습니다. ? 맺다가 또 잘못 맺으면 못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열매 맺는 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열매 맺는 삶인데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되는 것이지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구원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절대 안 됩니다. 구원은 출발 자체가 예수님에게서 와야 합니다. 거기서 온 말씀, 거기서 온 지혜, 거기서 온 것에서 되는 것이지 예수님에게서 출발이 안 되면 다 가짜가 되는 것입니다. 출발이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서 온 말씀이냐, 아니냐입니다. 그 가르침이 예수님이냐, 아니냐입니다. 왜 성경 강해를 못 듣느냐? TV를 못 보느냐? 출발이 예수님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어떤 좋은 말에 불과하지 그것이 구원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냥 좋은 얘기입니다.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구원과는 무관합니다. 그것이 오늘날 설교들입니다. 으샤으샤 하는 내용들인데 그거 알아서 뭐 합니까? 구원과는 무관한 내용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메시지가 있느냐, 없느냐를 찾아서 우리가 예배를 진단을 내립니다. 그래서 온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이지 이것이 인간적인 친목 때문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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