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GospelChurch 박경호목사 이사야 28장 [유대교가 천국으로 인도하는데 실패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천국의 기초돌이 되셔서 다양한 구원의 역사를 나타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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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GospelChurch 박경호목사 박경호번역성경  상세정보 보기 &  책 구입하러가기(URL 클릭!) www.4gospelchurchbooks.com   이사야 28 장 [유대교가 천국으로 인도하는데 실패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천국의 기초돌이 되셔서 다양한 구원의 역사를 나타내 주십니다] 1 절입니다 .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 사실 이 선지서는 우리말로 볼 수가 없습니다 . 왜냐하면 이게 너무 오번역이 많기 때문입니다 . ‘woe’ ‘ 화로다 ’ 입니다 . 그러니까 지옥이죠 . 누구냐면 ‘the crown of pride’ ‘ 교만의 면류관에게 ’ 입니다 . 누구냐 ? 에브라임의 술 취한 자들입니다 .   에브라임은 산당이 많은 곳이죠 . 유대에는 성전이 있습니다 . 성전에서만 구원이 존재하지 산당은 사실 구원이 희박한 곳입니다 . 그러니까 산당도 예배처지만 산당 예배는 법궤가 없기 때문에 , 그러니까 구원이 어렵기 때문에 항상 구원은 예루살렘과 유다 쪽으로 나온 것입니다 .   에브라임은 예배를 드리지만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그런 것입니다 . 현재 있는 북이스라엘입니다 . 그래서 이것은 지금 잘못된 예배를 드리는 어떤 사람을 알 수도 있습니다 .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 ‘glorious beauty’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이 ‘fading flower’ 사라지는 , 지는 꽃입니다 .   그들이 영광이 있습니다 . 그 속에도 영광이 있습니다 . 그런데 지는 꽃입니다 . 원래 꽃이 지면 안 됩니다 . 꽃이 지면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 이것은 일시적으로 은혜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 이것이 중요합니다 .   우리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세계에서도 꽃이 있습니다 . 그런데 지는 꽃입니다 . 나중에 구원이 안 됩니다 . 그래서 일

4GospelChurch 박경호 목사 이사야 9장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구원이 상실되지만, 갈릴리(스불론과 납달리)는 예수님의 복음사역으로 구원의 빛이 임할 것이 예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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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9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구원이 상실되지만,

갈릴리(스불론과 납달리)는

예수님의 복음사역으로

구원의 빛이 임할 것이

예언되었습니다]



1절입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오번역입니다. ‘in her vexation’ 고통가운데 있었던, 있는 것처럼 ‘dimness’ 어둑어둑함입니다. 어둑어둑함은 밝은 것도 아니고 깜깜한 것도 아닙니다. 이 어둑어둑함이 ‘shall not be’ 있지 않을 거라는 것입니다. 갈릴리는 과거에 사사기 때부터 예루살렘의 멸망까지 거의 조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갈릴리라는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에 ‘at the first’ 처음에는 ‘lightly’ 가볍게 고통할거라는 것입니다. 이 때는 구원이 약간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afterward’ 후에는 더 심한 고통이 온다는 것입니다. 더 추락하는 건데 어디냐면 해변 길, 요단 건너, 그리고 이방의 갈릴리입니다. 신약에 이미 이 내용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출현 때 이것이 성취됩니다. 아무에게도 각광받지 않던 갈릴리, 종교의 중심지인 유다와는 달리 새로운 갈릴리가 신앙의 운동이 일어날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신앙이 추락해서 구원받은 자가 별로 없는데 나중에는 그곳에서 다시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갈릴리 지역에서 거의 구원이 안 일어났기 때문에 깜깜한 것입니다.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큰 빛을 보고물론 신약에 예언된 말씀입니다.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드디어 갈릴리에 예수님의 전도를 통해서 구원의 빛이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4복음서는 갈릴리의 이야기입니다. 4복음서에는 유다와 사마리아가 안 나옵니다. 이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갈릴리가 영적으로 참혹했는데 드디어 빛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3절입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이 나라는 갈릴리입니다.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구원에 따른 즐거움이며 구원의 추수입니다. 드디어 갈릴리에서 12사도들과 갈릴리의 70인이 구원받습니다. 또 갈릴리에서 표적을 행하십니다.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구원의 즐거움으로 회복됩니다. 이 때 즐거움은 영의 즐거움입니다. 영의 즐거움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구원은 마귀의 손바닥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인간이 힘든 이유는 마귀의 힘 때문입니다. 이 힘은 보통 영의 고통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이 고통스럽습니다. 대한민국은 자살률 1위 국가입니다. 왜일까요? 마귀가 찍어 누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마귀의 세력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우리가 구원에 가는 과정이면 점점 편해지고 나중에는 그 멍에들이 벗겨지게 됩니다.

 

5절입니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every battle of the warrior’ 모든 전사들과의 전투와 ‘confused noise’ 시끄러운 소리들입니다. 어둠의 귀신들은 전사입니다. 인간이 고통을 왜 당하느냐?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귀신들이 우리를 묶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내가 구원받으면 귀신들을 묶습니다. 그 차이입니다. 내가 묶였을 때는 힘든데 구원받으면 내가 묶습니다. 그래서 귀신들이 떠나갈 때 시끄러운 소리를 냅니다. 그리고 ‘rolled in blood’ ‘옷들이 피로 말라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사들이 죽는 모습입니다. 전사들이 피를 옷에 묻히고 죽는 것입니다. 귀신들이 죽는 것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의 나의 구원자가 되셔서 내 안의 어둠의 귀신들을 쫓아내주시면서 그들이 죽어가는 모습입니다. 어떻게 증명하느냐? ‘but this shall be with burning’ 불탐입니다. 불타는 것은 지옥불입니다. 귀신들이 지옥불로 던져지는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이냐? 내 안의 귀신이 결국 지옥 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한 가지입니다. 내가 이기면 천국이고 지면 지옥입니다. 내 안의 귀신이 나를 묶어서 죄를 짓게 하고, 고통을 주고, 병을 주는데 이 귀신이 거꾸로 나에게 져서 그들의 옷이 피로 물들며 죽어서 불타는 것입니다.

또한 ‘fuel of fire’ 불의 연료입니다. 지옥불의 연료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지옥의 땔감입니다. 귀신들이 지옥 가서 그 땔감으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지옥은 귀신의 처소입니다. 지금 정확하게 구원을 묘사하는데 이것이 마가복음입니다. 구원이 무엇이냐? 축사가 구원입니다. 그래서 한번에 1회적인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귀신은 한 번에 안 나갑니다. 내 안의 귀신이 나가야만 구원받는 것입니다. 귀신들이 우리 안을 묶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미워하기 싫어도 미워하게 되고, 상처받기 싫어도 상처받게 되고, 괜히 힘들어하고 열받아하는 것입니다. 귀신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으면 능력으로 말미암아 귀신이 나가서 거꾸로 그들이 지옥 가기 때문에 안 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귀신들도 지면 지옥 가니까 안 나가려고 우리를 이기려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이기느냐 지느냐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기기 위해서 말씀을 보고 기도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기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6절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물론 아기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아기가 우리 영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영에 들어오십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누구일까요?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계신 예수님이 드디어 내 영에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구원으로의 오심입니다.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government’ 통치력입니다. 드디어 나를 통치합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이해할 때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그 작은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어라고 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내가 구약을 통해서 온전히 법대로 살고 회개해서 준비가 되었을 때 내 마음에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주인공입니다. 드디어 내 영에 들어오셔서 나를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Wonderful’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느낄 때 참 놀랍다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놀라움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들어오신 날부터 인생이 바뀌고 새로워지고 삶의 모든 것이 변화되니까 놀라운 것입니다. ‘모사라’ ‘Counsellor’입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지혜로 역사하십니다. ‘너 이것이 옳은 게 아니니?’하고 우리에게 강하게 감동하시는 모세로서의 역할입니다. 옛날에도 왕의 한쪽에는 대제사장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지혜자가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왕에게 말해줍니다. counsellor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감동과 은혜를 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또한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기 같은데 전능자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전능자로 역사하십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라아버지처럼 우리를 대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 안에서 아버지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이 끝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한도 끝도 없이 사랑하십니다. 천국에 가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사랑해주십니다. 주님이 임재하시면 하나님 아버지의 돌보심이 있는 것입니다.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원어는 평안의 왕자입니다. 이제 평안이 넘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존재 때문에 이전의 평안과 다른, 또 다른 평안이 넘치는 것입니다. 이전의 평안함은 기껏해야 돈을 벌 때 오는 맛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평안함이 내게 오기 때문에 평안의 왕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이스라엘에 나타나셨던 예수님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우리 마음에 임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드디어 갈릴리,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에 어둠 가운데 있던 자들에게 구원의 빛이 임한 현상을 나타낸 것입니다.

 

7절입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그 통치와 평안함은 ‘increase’ 계속 증가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으면 우리의 평안함이 증가되며 통치가 강해져서 점점 그리스도의 어떤 형상으로 닮아가는 것입니다. ‘또 다윗의 왕좌와다윗은 이 땅에 있는, 이 땅에서의 통치권자입니다. 예수님은 나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자들 모두에게 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왕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림부터 재림까지, 아니 영원까지 이 땅의 자연계에서 민족의 왕이 되십니다. ‘그의 나라에’ ‘his kingdom’ 낙원 천국입니다. 낙원 천국의 왕으로서, 이 땅의 믿는 자의 왕으로서 ‘to order it’ 질서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order질서를 세우다, 정리하다, 체계를 갖추다입니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나라, 무형교회의 왕으로서 질서를 세워 가시는 것입니다.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의 질서를 세워 가십니다.

‘with judgment and with justice’ judgment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너 이러면 내 나라에 못 들어와!’라는 것이 심판의 말씀입니다. testimony너 이러면 천국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은 정의라고 번역했는데 번역이 안 좋습니다. ‘너는 내 나라에 못 들어와! 지옥 가!’라는 선언이 있는 것입니다. justice너 이러면 의로워져서 내 나라에 들어올 수 있어라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는 정의를 베풀어주셔서 의로운 자가 들어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establish하시는 것입니다. establish설립하다, 확정짓다, 유지하다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나라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지금부터, 그 후부터, 영원까지입니다. 주님의 초림 때부터 영원까지, 계속 끝까지 왕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영원한 왕이 되십니다. 나에게서 왕이 되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왕이 되셔서 나중에 재림 이후로도 계속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셨은즉

그런데 이런 일들이 모두에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일들은 납달리와 스불론에게만 임한 것입니다. 말씀은 다 임하는데 희한하게도 이것이 이행이 안 되는 데가 드디어 출발됩니다. 누구는 구원받고 누구는 구원을 못 받는 것입니다. 다 기독교인이고 다 예배를 드리지만 안 됩니다. 그래서 이 스토리에서는 안 되는 자들이 안 되는 이유가 나옵니다. 구원의 열망이 없던 자들에게 빛이 임하여 구원을 받아서 이렇게 wonderful이며 counsellor이며 The mighty God이며 everlasting Father이며 prince of Peace이신 예수님이 안 되는 자들이 있습니다.

 

9절입니다.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주민이 알 것이어늘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주민이 알 것이어늘안 되는 자들이 있는데 바로 에브라임과 사마리아입니다. 합해서 사마리아인데 앗수르에게 당합니다. 원래 에브라임은 사사기 시대 때 신앙이 제일 좋은 자들이었습니다. 여기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사마리아, 세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왜 안 되느냐? ‘pride’ 교만한 것입니다. ‘stoutness of heart’ 마음의 비대함입니다. 마음이 둔한 것입니다. 말씀이 임하지 않습니다.

 

10절입니다.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는도다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예수님이 주신 참된 지혜의 말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무언가로 무너진 것을 자꾸 쌓는 것입니다.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는도다자기가 알고 있는 지혜와 지식으로 진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8절에서 분명히 ‘a word’ 말씀이 왔습니다. 요한복음에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고 되어있습니다. 그 말씀을 육신으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이들은 말씀으로 안하는 것입니다. 깨달은 교리, 전통, 누구의 간증이 기본이 됩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는 예수님이 나에게 왕 되시는 길입니다. 무엇으로 아느냐? 자신의 경험과 체험으로 압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르신의 대적들을 일으켜 그를 치게 하시며 그의 원수들을 격동시키시리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르신의 대적들을 일으켜르신은 과거 아람의 왕이었습니다. 아람은 앗수르에게 무너지는데 아람은 거듭나기 전의 기독교를 말합니다. 그들이 어두워졌을 때 대적자들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거듭나기 전의 기독교를 무너뜨린 앗수르를 일으켜 그를 치게 하시며 그의 원수들을 격동시키시리니’ ‘너도 안 돼. 네가 교만하고 완악하기 때문이야. 그런데 너만 안 되는 것이 아니야라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그들이 모두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수리아(시리아)입니다. 지금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북이스라엘인데 갈릴리는 됩니다. 왜 안 되느냐? 예수님 당시에 수리아에서 말씀을 들으러 왔지만 수리아에서 구원 받은 사례는 하나도 없습니다. 분명히 4복음서에는 수리아에서 말씀을 들으러 왔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수리아에서 구원 받은 사례는 하나도 없습니다. 아람, 곧 시리아는 구원에서 제외된 것입니다.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거듭나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예수님 당시에는 블레셋에도 사람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블레셋은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4복음서에는 블레셋 사람이 한 명도 나오지 않습니다. 일곱 족속 가운데 한 명인 가나안 여자는 있는데 블레셋은 안 나옵니다. 왜일까요? 그들은 안 받아들인 것입니다. 아람, 곧 시리아와 블레셋은 안 받아들입니다.

사마리아는 받아들였을까요? 사마리아는 우물가의 여인 한 명만 구원받았습니다. 사마리아에 구원받은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도 영토는 넓지만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은 들어갔지만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너도 아람과 블레셋과 똑같아. 너 북이스라엘에도 구원이 없어. 네 앞에는 아람이고 뒤에는 블레셋이야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팔레스타인은 400만 정도가 있으며 예수님 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 명도 안 나옵니다. 그들이 마음을 닫았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그들에게 구원상실로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내가 아람과 블레셋에는 구원을 안 줄거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속 펴서 구원을 막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그리하여도 그 백성이 자기들을 치시는 이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구원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와 종려나무 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리니

드디어 완전히 없애는 작업입니다. 기독교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고 구원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없애는 것입니다. 어떻게 없애느냐? 머리와 꼬리와 종려나무 가지와 갈대를 없앱니다.

 

15절입니다.

그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그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그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율법사들과 장로들입니다. 이들은 교계를 이끄는 인도자들입니다. ‘그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세례 요한 때도 선지자들이 많았지만 세례 요한만이 참 선지자였습니다. 그들을 자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구적으로 제명하는 것입니다. 이제 가능성도 없습니다. 먼저 구원상실이 임합니다. 거꾸로 백성에게는 늦게 임하고 먼저 인도자들에게 구원상실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내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을 미혹하니 인도를 받는 자들이 멸망을 당하는도다

인도자들이 먼저 구원상실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사들이 지옥 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그래도 가능성이 있는데 목사들은 다 지옥 갑니다. 무엇이 환란기일까요? 목사들이 지옥가면서 강단에 서 있는 것입니다. 남들을 인도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성도들이 구원과 구원이 아닌 것의 중간이었는데 가면 갈수록 지옥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비극 중에 비극입니다. 천국가려고 교회를 가는데 오히려 가면 갈수록 더 악해집니다. 하나님이 인식이 안 됩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에 있을 때만 하나님이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안 보이고 하나님이 허공인가? 힘인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빛을 못 보는 세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옥은 깜깜함이며 불이 타는 곳입니다. 저번에 번역을 하면서 4의 경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원어가 감옥이었습니다. 원래 지옥은 영의 감옥입니다. 과거에는 밤이 되면 불이 없으니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밤의 어두움을 감옥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깜깜함, 이것이 인간에게 저주인 것입니다. 구원은 빛의 세계입니다. 죄와 마귀를 물리치고 드디어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거하면 또 다른 세계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낙원 천국이 있고 이 땅의 주님의 왕국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 들어와야 하는데 judgment의 말씀에 걸려서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justice’ 고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뇌들이, 머리들이 의롭게 고해하지 않고 엉뚱한 쪽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율법사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바르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먼저 지옥으로 선언해 버린 것입니다.

 

17절입니다.

이 백성이 모두 경건하지 아니하며 악을 행하며 모든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의 장정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그들의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이 백성이 모두 경건하지 아니하며오번역입니다. ‘young men’ 청년들이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신앙이 좋아야 청년들입니다. 이제 머리들도 끊어지고 청년들도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고아와 과부들도 자격이 없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들도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고통을 받는 자들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이 땅의 구원들이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자가 ‘hypocrite’ 위선자라는 것입니다. 천국 간다고 믿지만 안 가는 것이 위선자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천국을 확신하는데 다 지옥 가는 것입니다. ‘evildoer’ 악행 하는 자들입니다.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입은 거짓을, 어리석음을 말하는데 이 모든 것에 대하여 그분의 분노가 돌아서지 않고 여전히 계속 구원상실이라는 집으로 몰아넣으시는 것입니다. 구원을 못 받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시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대저 악행은 불 타오르는 것 같으니 곧 찔레와 가시를 삼키며 빽빽한 수풀을 살라 연기가 위로 올라가게 함과 같은 것이라

오번역입니다. 불처럼 타올라 찔레와 가시를 삼키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들을 삼키는 것입니다. ‘빽빽한 수풀을 살라 연기가 위로 올라가게 함과 같은 것이라오번역입니다. mount up입니다. 처음에 불이 있었는데 나무에 타올라서 옆에 있는 구원받지 못한 찔레와 가시에 불이 번지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숲에 다 타올라서 연기가 멀리 올라갑니다. 숲이 다 불타는 것입니다. 완전한 심판입니다. 그래서 ‘mount up’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말미암아 이 땅이 불타리니 백성은 불에 섶과 같을 것이라 사람이 자기의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말미암아 이 땅이 불타리니오번역입니다. 이 땅이 ‘darkened’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이 땅이 어두워집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사람들이 ‘as the fuel of the fire’ 불의 땔감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옥불의 땔감입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유다가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no man’ 어떤 사람도 그의 형제를 ‘spare’ 아끼거나 남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을 잃어버렸는데 다른 사람을 먹는 것입니다. 점점 구원상실이 늘어납니다. 구원상실이 한명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잃어버린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을 또 먹어버립니다. 마치 사울이 다윗을 먹듯이 먹으려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20절입니다.

오른쪽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왼쪽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오른쪽으로 ‘snatch’ 잡아챌지라도 굶주리는 것입니다. ‘왼쪽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오른쪽 사람도 먹어버리고 왼쪽 사람도 먹어버립니다. 아버지가 아내의 구원을 잃게 만들고 다시 또 자녀의 구원을 잃게 만듭니다. 계속 먹어버리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먹느냐? 그들이 ‘eat every man’ 모든 사람을 먹는 것입니다. 구원상실 된 사람 안에 있는 영이, 마귀가 다 먹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의 신앙을 떨어뜨릴까요? 누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까요? 사람입니다. 사람이 내 구원을 잃게 하기도 하고 죽게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신실했던 자가 구원의 세계에서 한 순간에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일까요? 아는 전도사가 미혹되었거나, 아는 기도하는 사람이 미혹되었거나 그러면 같이 추락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을 믿어야지 그런 사람들을 왜 믿습니까? 이상하게도 구원을 잃어버린 사람을 믿는 것입니다. 구원상실은 번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거의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실된 종들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애기 때부터 다 악하게 태어나며 자살률 1위입니다. 엄청 안 좋은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얼마나 악해졌는지 모릅니다. 제가 옛날에 여행 다닐 때 홍콩이나 일본, 러시아의 전철을 타면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악해서 탈 수가 없습니다. 그 악함 때문에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그렇습니다. 마음이 악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악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hypocrite’ 위선자입니다. 전부다 천국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거꾸로 다른 사람들을 지옥 간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악이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21절입니다.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므낫세는 동편 지파이기 때문에 초반에 먹혔습니다. 요단강 왼쪽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있었는데 먼저 므낫세가 먹히고 그 다음에 에브라임이 먹힙니다. 서로 먹고 먹히는 것입니다. 서로 연합할수록 나빠지는 것입니다. 원래 신앙은 연합할수록 좋아지는데 구원상실의 세계는 연합할수록 나빠집니다. 그래서 점점 더 나빠지는 것입니다.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유다는 종교의 메카인데 드디어 유다에도 구원상실이 있음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갈릴리에 있는 스불론과 납달리만 은혜가운데 있고 므낫세, 에브라임, 유다는 구원상실로 다 먹힙니다.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하나님이 버리신 건데 왜 진노하시는 걸까요? 버린 이유는 악 때문입니다. 인간의 악과 죄악은 나를 유기하는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악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버리시는 것입니다.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아브라함도 하갈을 통해서 간음하며 야곱도 두 종과 간음합니다. 이것이 악입니다. 성군도 악한데 하물며 인간이 얼마나 악하겠습니까? 그런데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justice입니다. 그 기준에 도달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judgment입니다. 드디어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멸망이 어디서 올까요? 멸망은 악에서 옵니다. 결국 이스라엘 가운데 전체가 다 멸망하는데 막판에 빛이 비추었습니다. 예수님 때 비춰 주셨습니다. 그러면 갈릴리는 영원했느냐? 아닙니다. AD 70년에 이스라엘이 멸망당합니다. AD 70년에는 완전히 성전이 무너져버립니다. 갈릴리도 오래 안 가는 것입니다. 분명히 갈릴리에서 예수님이 역사하셔서 거기도 구원이 일어났으며 빛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오래 가지 않습니다. 어떤 교회가, 어떤 교파가, 어떤 종교가 우리를 구원해주지 못합니다. 그 교회가 참교회일 때만 구원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구원은 무지 어렵습니다. 구원 안에 있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제 이 구원이 늘어날 수 있도록 우리는 더 깊은 데로 나아가야 하는데 고통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을 받아야만 다른 사람에게 구원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내가 고통을 받아들이고 점점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영광을 누리려면 하면 안 됩니다. 기독교가 타락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모든 목회자들이 다 고통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목회자들이 영광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잃어버립니다. 목회자들이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좋은 집에 삽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전하는 사람이 이 땅의 것을 왜 가집니까? 지옥 가는 사람들이 인도자가 되어서 영혼들을 다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일은 반복됩니다.

제가 어릴 때 목회자들은 다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가서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미워하면 안 됩니다. 어려움과 고통을 좋아해야 합니다. 고통이 있을 때 진실된 기도가 나오며 고통 속에서 진실된 찬양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당기고 고통을 좋아하고 바울처럼 고통 안으로 뛰어드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영광을 얻으려는 것은 지옥 갈 사람들의 결정입니다. 우리는 영광을 좋아하면 안 됩니다. 고통을 좋아해서 자꾸 뛰어드는 것입니다. 핍박들을 감수하고 하나님 뜻만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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