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GospelChurch 박경호 목사 이사야 12장 [예수님의 초림으로 대규모 구원과 그에 따른 기쁨과 찬양 그리고 찬송과 감격의 외침이 천국에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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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2장
[예수님의 초림으로 대규모 구원과
그에 따른 기쁨과 찬양
그리고 찬송과 감격의 외침이
천국에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1절입니다.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그 날에’ 이사야에서 그 날은 언제일까요? ‘in that day’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초림부터 복음이 왕성히 전파되는 복음전파 기간에 대한 총칭입니다. 성경에서 하루가 천 날 같다고 했죠. 하나님의 계산에서 ‘that day’라는 것은 하루가 아니라 어떤 기간인데 복음전파 기간이 in that day, 그 날입니다. 그리고 너는 말할 거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느냐? ‘O LORD’ 오 여호와여, ‘I will praise thee’ 찬미할거라는 것입니다. ‘찬양하다, 찬미하다’의 원어는 ‘칭찬하다, 칭송하다’입니다. sing은 노래이지만 praise는 ‘칭찬하다, 칭송하다’인데 ‘그 사람 위대해’, ‘대단해’, ‘훌륭해’라는 것이 찬양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받은 자만이 찬양이 됩니다. 구원을 안 받으면 노래는 되지만 찬양은 안 됩니다. 찬양은 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영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안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누가 찬양하는 걸 보면 전부 다 구원받은 자이지 구약에서 아무리 봐도 찬양이 안 나옵니다.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찬양은 노래나 신앙고백이 아니라 영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영으로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though’ 비록 ‘thou wast angry with me’ 당신이 나에게 화가 났었다 할지라도 ‘thine anger’ 당신의 분노가 ‘is’ 현재 ‘turned away’ 돌아섰다는 것입니다. 구약 때까지는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굉장히 분노로 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아담부터 노아까지 구원받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노아 때부터 아브라함까지도 드물었습니다. 아브라함 때 드디어 이루어서 민족적인 구원이 많이 이루어졌죠. 그런데 그것도 전 지구에서 한 민족에 속했습니다. 하지만 신약 때는 이 복음이 전 지구에 퍼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덜 분노하시는 것 때문입니다. 우리를 받아주시는 해, 하나님께서 참고 참는 해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는 받아주시는 해가 되는데 신약 때 많이 구원을 얻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나님이 분노를 적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thou comfortedst me’ 나를 위로했다는 것입니다. 위로가 무엇일까요? ‘comfort’라는 단어는 위로가 아닙니다. 이 단어는 ‘우리를 평안케하다’입니다. 슬픔 가운데 있는데 누가 위로하면 마음이 평안해지죠. 드디어 구원을 얻어서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함으로 구원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언제? 초림부터 2000년까지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구원이 별로 없어집니다. 환란기 때는 ‘젖먹이는 자들과 아이 벤 자들에게 화있다’입니다. 거듭남을 주는 사람들도 다 구원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난 자, 거듭남을 행하는 자도 다 구원을 잃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대 환란 때는 구원이 엄청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이것은 대 환란 전, 2000년 전까지를 의미하며 그 때 전 세계적으로 복음이 계속 증가되었으니까 당연히 하나님은 구원이십니다.
‘I will trust’ 내가 당신을 의지할 것이며 ‘not be afraid’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으면 두려움이 사라지죠. 사람은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우리나라가 자살률 1위라고 하는데 두려움으로 자살하는 것입니다. 어떤 두려움이냐? 삶의 두려움입니다. 사는 것이 참 무섭고 하루하루가 고통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으로서 고통을 잊겠다는 것이 자살하는 이유입니다. 왜 자살하느냐? 사느니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이 없어져버립니다. 베드로가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가 되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감옥도 핍박도 안 두려워합니다. 두려움이 사라져버립니다. 구원받으면 마음에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for’ 왜냐하면 ‘LORD JEHOVAH’ 주 여호와가 ‘is my strength’ 나의 힘이며 ‘and my song’ 나의 노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노래이다? 하나님께 노래한 적이 있나요? 별로 없습니다. 구약에는 노래가 없습니다. 다윗 때 한 번 있습니다. 그 때 성가대가 4천명이었습니다. 구원을 받으면 노래가 나오죠. 노래가 무엇일까요? 내가 꽃을 좋아하면 꽃을 사진 찍고 그림을 그리고 ‘오 아름다운 꽃이여’라고 씁니다. 꽃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내가 자연을 좋아하면 자연을 사진 찍고 그림을 그리고 자연을 노래합니다. 사람은 좋아하는 것을 노래하고 찍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좋아할까요? 남녀의 사랑을 좋아하니까 ‘그대 없이는 못 살아~’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노래는 그 사람의 애호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고향을 좋아하면 고향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에는 그 사람이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이 나옵니다.
대부분의 가요들은 노래에 이성의 사랑을 그립니다. 그걸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 이것을 찬송이라고 부릅니다. ‘힘들고 지쳐~’ 내 애환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CCM이 된 것입니다. 찬송은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그래서 찬송과 CCM은 다른 것입니다. 복음성가는 중간 쯤 있습니다. 찬송은 하나님만을 찬양합니다. CCM은 나를 중심으로 노래합니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도와주세요’, ‘나 이거 원해요’, ‘축복을 원해요’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좋아합니까? 축복을 좋아합니다. 축복을 좋아하니까 축복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노래합니다. ‘우리 아들을 주의 종이 되게 하소서~’ 내 아들이 주의 종이 되기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이 찬송가입니다.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내 진정 사모하는’,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이것이 하나님의 노래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입니다.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이 찬송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노래는 찬송가라 불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들이 구원의 은혜의 감격입니다. ‘찬양하세 나를 구원 하셨네~’ 이런 찬양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께 힘을 얻습니다. 영적인 힘입니다. 나에게 힘을 누가 줄까요? 예수님입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말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여기 여호와가 누구냐? 앞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입니다. 구약 때 구원하신 분입니다. 신약 때는 누가 하느냐?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he also’ ‘그분 또한’입니다. 같은 하나님인데 성자 예수님, 그분 또한 ‘is become my salvation’ 나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신약 때는 누가 구원을 인도할까요? 예수님이 구원을 여신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은 다릅니다. 그래서 구원을 여시는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좀 다릅니다. 같은 분인데 무엇이 다를까요? 분노가 다릅니다. 하나님은 엄청 무섭습니다. 예수님은 덜 무섭습니다. 다릅니다. 예수님께 바턴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 이어지는 것입니다. 권세를 받는 것입니다. 어떤 권세냐? 구원의 권세입니다. 우리가 구약 때 살았으면 다 지옥 갔습니다. 지금 신약 때는 예수님이 구원을 여셨기 때문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예수님께 맞춰져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 때 있었으면 택도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를 받아주시고 인도해주셔서 은혜를 주십니다.
3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거듭남은 우물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샘입니다. 거듭날 때 우리의 마음에 샘이 생겨서 마음에 기쁨이 올라오는데 되게 작습니다. 구원받으면 수가성 우물처럼 우물이 있는데 우물에서 기쁨이 많이 올라옵니다. 구원받으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마음에 계속 충만의 물인, 성령을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우물들입니다. 우리 안에 우물이 몇 개까지 있을까요? 7개까지 있습니다. 브엘세바, 7개의 우물입니다. 브엘세바는 영생을 얻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그 우물들이 7개까지 있는데 매일 우리에게 기쁨의 우물을 퍼 올려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입니다. 매일 좋습니다. 구원은 매일 7개의 우물이 있어서 매일 즐거움의 우물이 퍼 올라와집니다. 구원의 세계입니다. 거듭남은 1년에 한 번, 수련회 때 우물이 퍼 올라와집니다. 한 달에 한번, 빠르면 일주일에 한번 퍼 올라와집니다. 그런데 구원받으면 이것이 끊어지질 않습니다. 그래서 기쁨의 우물들이 한 개가 아니라 일곱 개까지 있어서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그 날에’ 그 날은 초림부터 복음전파 되는 복음전파의 기간을 말합니다. 너희가 또 말할 거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느냐? ‘praise the LORD’ ‘여호와께 칭찬하라’입니다. ‘call his name’ ‘그의 이름을 불러라’입니다. 기도할 때 예수님을 부르는 것일까요? 이것은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을 불러야죠. 기도할 때 예수님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기도가 됩니다. 부름만으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할 말이 없는데 만들면 안 됩니다. 그냥 ‘아버지’라고 하면 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하늘들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기도할 때 ‘아버지’하는 그 말이 기도입니다. 기도 못할 때는 간단합니다. 호칭이 기도입니다. ‘예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할 말이 없는데 만들 게 뭐가 있겠습니까? 누구를 만났는데 할 말이 없으면 이름만 부르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화입니다.
이것은 그게 아닙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얻으리라’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성경을 믿습니다. 나도 예수님을 부릅니다. 로마서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써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그의 이름은 존재입니다. 없는데 부르는 건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부른다는 의미는 그냥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나에게 그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없으면서 부르는 것은 속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부르는 것입니다. 실제로 나에게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 계시니까 불렀습니다. 당연히 그 사람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없으면서 괜히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에 있으니까 부르는 것이며 그래서 ‘call’ ‘불러라’입니다.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 그의 행하심을 ‘declare’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행하심이 무엇일까요? 그분의 구원으로의 행하심, 복음전파입니다. 예수님의 행하심은 구원의 행하심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구원사역입니다. 예수님은 딴 생각을 안 하시고 거의 복음전파를 생각하십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하죠. 예수님은 거의 구원 위주로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지구의 역사는 전부 다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분의 행하심을 선포하라’ 그분의 구원사역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있는 사실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안 믿는데 선포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놀랍게도 초림부터 2000년까지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구약에 이미 예언되어 있다는 것이 더 놀라운 것입니다. 전파가 놀라운 것이 아니라 구약에 이미 예언되어 있다는 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성경은 참 놀랍습니다. 800년 전에 이미 예언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네 후세들이 400년간 객이 되리라’라는 것을 예언 받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객이 됩니다. 성경은 성경이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게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창세기 때 ‘일곱 족속을 쫓아내리라’라고 예언된 것이 구전되어왔는데 신기하게 700년 뒤에, 800년 뒤에 실제로 쫓아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때 ‘일곱 족속을 쫓아내리라’, ‘네 땅은 애굽 강부터 유브라데까지 이르리라’라고 얘기하셨습니다. 아직 혼자 있는데 신기하게도 나중에 700~800년 뒤에 솔로몬이 다 쫓아내고 이기고 정복합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베들레헴이 작지 아니하리로다’ 신기하게도 처녀가 아들을 낳으며 베들레헴에서 탄생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게 신기합니다. 신약시대의 복음전파가 이미 로마서에 예언되고 이사야에 예언되고 많이 예언됩니다. 이렇게 퍼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퍼져서 다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exalted’ 높아지는 것에 대해서 ‘make mention’ ‘언급하다, 말하다’입니다. 언제 높아질까요? 인기를 얻어야 높아집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이름이 인기가 좋습니다. 옛날에는 인기가 없었죠. 로마 때 인기가 없었습니다.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2000년 때는 예수님의 이름이 인기가 좋아서 예수님이라고 말하면 아무도 거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욕할지는 몰라도 예수님은 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별로 볼 것도 없는데 예수님은 높임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전 지구에 퍼지니까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다 칭송합니다. 2000년도에는 믿는 자가, 기독교인 인구가 4분의 1, 3분의 1이었습니다. 높은 것입니다. 높아질 것이라고 이미 예언된 것입니다. 그것을 ‘make mention’ 말하라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Sing unto the LORD’ ‘여호와께 노래하라’입니다. 누가 노래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신약 때 구원받은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신기하게도 신약 때부터 노래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원래 노래가 다윗 때밖에 없었는데 다시 노래가 부활됩니다. 그래서 찬송이라는 새로운 게 기독교에 들어와서 찬송가가 예배 형식에 들어온 것입니다. 왜일까요? ‘sing’ ‘노래하라’입니다. 그래서 찬송이 예배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구약 때는 성전에 모여서 예배 드릴 때 예배 형식 가운데 말씀과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찬송이 꼭 들어갑니다. 왜일까요? 이것입니다. ‘노래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래하는 것입니다. 노래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심폐가 좋아지고 혈액순환이 좋아집니다. 가수들을 보면 이상하게 오래 삽니다. 노래가 주는 효과 때문입니다. 육신에 건강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노래하는데 사실 요즘은 노래 가운데 찬송은 많이 안 부르지만 노래는 하나님 앞에 찬양하면서 영적인 영광에 참 좋습니다.
‘나는 기도할 거야. 노래한다고 되는 게 뭐가 있어?’라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람은 감정이 있습니다. 사람은 감정이 올라와야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지식으로는 기도가 안 됩니다. 지식은 그냥 암송하는 것이지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사람의 감정으로 합니다. 사람은 말할 때 감정으로 말합니다. 감정이 없으면 기계처럼 말하는데 감정이 있으니까 ‘너 그럴 수 있어?’, ‘나 아파 죽겠어!’라고 합니다. 감정이 있어야 신앙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감정이 없으면 신앙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감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야. 나는 말씀을 의지해’라고 해서 말씀을 암송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별로 할 게 없습니다. ‘나는 말씀으로 할 거야’라고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정이 들어가야만 기도가 됩니다. 감정이 없으면 기도가 안 들어갑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붙잡을 때 감정으로 들어가니까 ‘날 축복해주세요!’라고 합니다. 감정이 중요합니다. 신앙에 감정은 소용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신앙에는 감정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감정이 있습니다. 막 열 받으시다가 또 푸십니다. 감정이 없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이성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은 지략과 감정이 의지로 발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정이 있는데 노래는 감정을 살려주는 것입니다. ‘내 주의 보혈은~’하면 감정 가운데 슬프거나 애통의 감정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죄인 오라 하실 때에~’를 들을 때 감정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가 기도에 엄청 유익합니다. 찬송 없이 기도하면 기도가 잘 안됩니다. 올라오는 감정, 그것이 또 하나의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감정적 신앙이 나쁘다? 좋다?’라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감정이 없는 신앙 자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굉장히 사랑했죠. 사랑한다는 것도 감정입니다. 사랑하니까 그윽해지고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감정입니다. 신앙에도 감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노래는 하나님에 대한 기쁨의 감정, 감사의 감정이 나에게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할 때 감정 이입이 됩니다. 나도 모르게 감정이 들어가서 울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웃기도 합니다. 당연하죠. 검정의 변화가 없으면 기계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목소리 톤에도 감정이 있습니다. 노래는 감정을 발산하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음률 속에는 감정이 들어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감정을 하나님 앞에 노출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다음에 감정을 노래로 표출하는 것입니다. 감정에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하나님 앞에 통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노래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he hath done excellent things’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딴 게 아니라 구원입니다. 축복은, 놀라운 일은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놀라운 일입니다. 구원보다 더 큰 복이 없습니다. ‘this is known’ 이것은 온 땅에 알려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복음이 온 땅에 알려지기 때문에 놀라운 것입니다. 지구 방방 곳곳에 복음이 다 들어가서 지금은 안 들어간 데가 별로 없습니다. 물론 아직도 있긴 있지만 복음이 다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감사하고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
‘Cry out and shout’ 같은 말인데 틀립니다. cry out과 shout 둘 다 ‘외쳐라’입니다. 그럼 무엇이 다르냐? shout은 ‘외치다’도 되는데 노래로 외치는 것을 포함합니다. cry out은 노래에 쓸 수 없습니다. shout이라는 단어는 ‘찬송을 세게 부르다’입니다. 그래서 shout은 노래에 쓰는 외침이며 cry out은 그냥 말을 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노래할 때 크게 ‘야! 외쳐라!’라고 하는 걸까요? 그것도 됩니다. 노래할 때 세게 부르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안 받으면 노래가 안 나옵니다. 감정이 안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들어가면 소리가 커지는 것입니다. 감정이 확 들어가기 때문에 노래가 커집니다. 그래서 노래할 때 소리가 커지고 신나게 부르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드디어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넘친 것입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shout되는 것입니다.
누구이냐? ‘너 시온의 주민아’입니다. 시온은 천국입니다. 천국에서 찬양이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찬송을 많이 부릅니다. 그래서 구원하심이 하나님께 있다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 천국에서 크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작게 부를까요? 아닙니다. 똑같이 여기서도 크게 부를 것입니다. 감정이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노래를 안 부르는 사람이 천국 가서 노래할까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천국도 예배를 많이 드립니다. 여기 이 땅에서 예배를 잘 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천국 갈까요? 못 갑니다. 천국은 현재 우리 예배의 연장입니다. 거기서도 크게 찬송을 부릅니다. 감정이 올라와서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천국에서의 낙원에 있는 사람들의 노래가 되는 것과 동시에 이 땅에서 천국으로 남을 자, ‘remnent’ 들의 노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을 강하게, 세게 부르고 감격적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이미 여기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cry out과 shout로 부르는데 낙원도 크게 찬양이 나오며 이 땅에서도 찬양을 부르는 것입니다.
‘for’ 이유가 무엇이냐면 ‘the midst’ 너희 한가운데에 계신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great’ 크다는 것입니다. 낙원 한가운데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죠. 당연히 크게 외쳐 찬양합니다. 또 우리도 하나님, 머리가 되신 예수님께 크게 찬양을 불러서 우리의 구원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제일까요? 이것은 신약시대에 있을 일을 이사야가 예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이 넘쳐나는데 찬송가의 대가, 천편을 쓴 크로스비입니다. ‘내가 매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오니~’, ‘인애하신 구세주여~’ 크로스비가 쓴 것입니다. 크로스비 당시 미국에서 대대적인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 때 미국이 회개로 다 무너집니다. 부흥이 무엇이냐? 회개의 운동이 부흥입니다. 그래서 그 때 작사, 작곡이 많이 이루어집니다. 현재 우리가 이용하는 것들은 다 미국 찬송가들입니다. 그래서 미국이 지금 세계를 영성으로 지배하는 것입니다. 찬양이 울려 퍼지죠. 그리고 심지어 가요 가운데도 나왔습니다. 그것이 가스펠입니다. 미국 가요에 가스펠이 등장됩니다. 흑인 연가가 등장됩니다. 우리나라도 대중가요에 찬양이 나와야 합니다. 찬송가는 힘이 있습니다. 인간은 찬송가를 부르면서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찬송가에 복음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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