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GospelChurch 박경호목사 이사야 28장 [유대교가 천국으로 인도하는데 실패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천국의 기초돌이 되셔서 다양한 구원의 역사를 나타내 주십니다]

이미지
4GospelChurch 박경호목사 박경호번역성경  상세정보 보기 &  책 구입하러가기(URL 클릭!) www.4gospelchurchbooks.com   이사야 28 장 [유대교가 천국으로 인도하는데 실패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천국의 기초돌이 되셔서 다양한 구원의 역사를 나타내 주십니다] 1 절입니다 .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 사실 이 선지서는 우리말로 볼 수가 없습니다 . 왜냐하면 이게 너무 오번역이 많기 때문입니다 . ‘woe’ ‘ 화로다 ’ 입니다 . 그러니까 지옥이죠 . 누구냐면 ‘the crown of pride’ ‘ 교만의 면류관에게 ’ 입니다 . 누구냐 ? 에브라임의 술 취한 자들입니다 .   에브라임은 산당이 많은 곳이죠 . 유대에는 성전이 있습니다 . 성전에서만 구원이 존재하지 산당은 사실 구원이 희박한 곳입니다 . 그러니까 산당도 예배처지만 산당 예배는 법궤가 없기 때문에 , 그러니까 구원이 어렵기 때문에 항상 구원은 예루살렘과 유다 쪽으로 나온 것입니다 .   에브라임은 예배를 드리지만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그런 것입니다 . 현재 있는 북이스라엘입니다 . 그래서 이것은 지금 잘못된 예배를 드리는 어떤 사람을 알 수도 있습니다 .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 ‘glorious beauty’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이 ‘fading flower’ 사라지는 , 지는 꽃입니다 .   그들이 영광이 있습니다 . 그 속에도 영광이 있습니다 . 그런데 지는 꽃입니다 . 원래 꽃이 지면 안 됩니다 . 꽃이 지면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 이것은 일시적으로 은혜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 이것이 중요합니다 .   우리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세계에서도 꽃이 있습니다 . 그런데 지는 꽃입니다 . 나중에 구원이 안 됩니다 . 그래서 일

4GospelChurch 박경호목사 이사야 16장 [모압은 기도생활과 예배생활로 자신이 분명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지만, 열매없고 교만한 결국 지옥가는 신앙인입니다]

 

4GospelChurch 박경호목사

박경호번역성경 상세정보 보기

책 구입하러가기(URL 클릭!)

www.4gospelchurchbooks.com



 이사야 16

[모압은 기도생활과 예배생활로

자신이 분명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지만, 열매없고 교만한 결국

지옥가는 신앙인입니다]



1절입니다.

너희는 이 땅 통치자에게 어린 양들을 드리되 셀라에서부터 광야를 지나 딸 시온 산으로 보낼지니라

너희는 이 땅 통치자에게 어린 양들을 드리되오번역입니다. 여기서 너희는 모압을 의미합니다. 지난주에 모압은 howling, 즉 지옥을 선포했는데 오늘 말씀은 모압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됩니다. 모압이 이렇게 지옥을 가는데 영적인 내용물들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기에 15장에 이어 16장은 연장된 장입니다. ‘모압이 어떤 존재냐?’에 대한 영적인 규명에 해당됩니다.

땅의 통치자에게 어린 양을 드려라입니다. 그런데 셀라에서부터 광야까지입니다. 에돔의 페트라 바로 위가 셀라입니다. 페트라는 에돔의 수도이며 셀라도 수도였을 수 있습니다. 이 셀라부터 광야까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이 땅의 임금을 상징합니다. 동시에 거듭나고 구원받기 전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땅의 마귀에게 예배드림을 의미합니다. ‘어린양을 바쳐라입니다.

딸 시온 산으로 보낼지니라오번역입니다. 처음에는 땅의 통치자에게입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시온 산’, 낙원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짜 예배처인 낙원에 있는 예수님께입니다. 모압이 누구일까요? 모압은 예배를 땅에도 드리고 하늘에도 드리는, 마귀에게도 드리고 하나님께도 드리는 이런 형태가 모압입니다. 앗수르는 구원상실의 땅이죠. 모압은 불신자가 아니라 신자들입니다. 누구일까요? 이 땅의 마귀에게도 예배드리고, 하나님께도 예배드리는 박쥐들입니다. 박쥐들과 이 땅의 양다리들, 다 모압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 충성합니다. 그러나 욕심을 따라서 마귀에게도 충성합니다.

모압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모압은 이 땅의 재물을 좋아하고 이 땅의 쾌락을 좋아하고 이 땅을 좋아합니다. 동시에 하늘도 좋아합니다. 만약 신앙이 없으면 당연히 모압이 아니라 앗수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압은 가나안에서 멀지 않은 동네이며 요단 동편의 끝에 있습니다. 이 모압은 롯의 딸에서 나온 민족입니다. 신앙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옥 가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통치자에게도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도 예배를 드리는 어떤 사람이나 교파나 교회를 의미합니다.

 

2절입니다.

모압의 딸들은 아르논 나루에서 떠다니는 새 같고 보금자리에서 흩어진 새 새끼 같을 것이라

오번역입니다. 보금자리에서 던져진 방황하는 새와 같이 모압의 딸들은 암몬의 나루터, 아르논의 나루터 ‘fords’ 여울에 있을 거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가 있는데 얕습니다. 모압에도 은혜가 임합니다. 모압 사람들도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임합니다. 모압은 적들이 아닙니다. 거기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데 이 강들이, 아르논 강이 얕아서 그 얕은 은혜를 섭취합니다. 그래서 모압에는 은혜가 없지 않습니다. 분명히 지옥가지만 거기도 성령의 은혜가 흐릅니다. 그래서 아르논 강의 여울 같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새인데 쫓겨난 새입니다. 보금자리를 떠났을 뿐이지 새입니다.

 

3절입니다.

너는 방도를 베풀며 공의로 판결하며 대낮에 밤 같이 그늘을 지으며 쫓겨난 자들을 숨기며 도망한 자들을 발각되게 하지 말며

오번역입니다. ‘Take counsel’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구약에서는 ‘counsel’이라고 많이 기록합니다. 이것은 지혜나 꾀인데 사실은 감동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라는 것입니다. 받을까요? 받습니다. 모압은 신앙인들이며 성령의 감동과 느낌이 있습니다. 모압에도 발람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오해해서 그 사람 감동받아라고 하는데 그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그리고 ‘execute’ ‘실행하라입니다. ‘정의를 실행하라’, 감동을 따라 살기도 합니다. 이것은 가나안 얘기가 아니라 모압 얘기입니다. 모압은 감동도 받고 실행합니다. 헌신하기도 하고 충성하기도 합니다. ‘make thy shadow’ ‘대낮에 한가운데 있는 밤처럼 그늘을 만들라입니다. 대낮은 구원받은 성도의 상태입니다. 아주 기쁨이 충만합니다. 밤은 구원을 잃어버린 앗수르의 상태 또는 불신자와 신자의 중간 상태입니다. 기쁨이 있는데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늘입니다. 회색입니다.

모압은 검은색이 아닙니다. 아예 불신자거나 구원상실 된 자가 아니라 그늘, 회색입니다. 지옥 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압은 자기들이 천국 간다고 100%, 1000% 믿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이 느끼는 회색 그늘을 대낮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갖고 있는 영적인 은혜를 크게 봅니다. 그런데 그 큰 은혜는 사실 자기 판단이지 실제가 아닌 것입니다. 이들은 그늘입니다. 깜깜하지 않습니다. 죄를 많이 안 짓습니다. 거룩해 보입니다. 거룩합니다. 죄도 안 짓습니다. 그런데 모압입니다.

‘outcasts’ 추방자들을 ‘hide’ 숨기라는 것입니다. 모압이 누구일까요? 모압은 구원상실이라는 앗수르에 먹히지 않고 적당히 신앙생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실 그 적당히라는 것은 자기는 열심히 합니다. 그런 자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께서 참 교회에 있지 못하고 적당히 있게 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감동도 받으며 충성도 하는데 하나님께 버려진 자들입니다. 버림받았는데 아예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적당히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모압은 앗수르가 아닙니다. 구원상실이 아닙니다. 물론 상실이지만 표현양식상 상실로 안 보입니다. 그냥 신앙인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추방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방황하는 그들을 ‘bewray’ 들추어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모압인 것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의 모습을 알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너희는 버려진 자들의 모임이야. 들추어내지마라는 것입니다. 모압끼리 아무도 모릅니다. 그냥 모압끼리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물론 섞인 상태를 말합니다.

 

4절입니다.

나의 쫓겨난 자들이 너와 함께 있게 하되 너 모압은 멸절하는 자 앞에서 그들에게 피할 곳이 되라 대저 토색하는 자가 망하였고 멸절하는 자가 그쳤고 압제하는 자가 이 땅에서 멸절하였으며

‘Let mine outcasts’ ‘나의 쫓아낸 자들이 너와 함께 있게 하라입니다. 드디어 모압 교회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는데 구원상실은 아니고 예배를 드리는데 무리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탈취자들 앞에서 그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라입니다. 탈취자는 구원상실을 일으키는 자입니다. 앗수르입니다. 거기 안가고 그 직전에 다시 중간 단계로 모은 것이 모압입니다. 참교회와 잃어버린 이단과 중간에 속해있는 땅에 있는 미혹들입니다. 모여 있는 것입니다. 예배드립니다. ‘모아라는 것입니다. ‘탈취자끝났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extortioner’ 그 착취자들이 다하였고 탈취자들이 끝났으며 압제자들이 그 땅에서멸절당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다 나간 것이 아니라 적당한 믿음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거기들에게 안 줬어. 너희는 내가 따로 모아서 있게 하는 거야. 너희 믿음 있어. 하지만 천국에는 못가라는 얘기입니다. ‘너희는 아르논 강의 여울처럼 얕지만 믿음이 있어. 하지만 못 가. 내가 너희를 따로 모았어라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오번역입니다. 자비한 가운데 보좌가 ‘established’ ‘설정되다, 세워지다입니다. 다윗,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 모압의 무리에도 보좌가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다윗의 성막에 진리 가운데 그가, 그분이 앉을 거라는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다윗의 성막, 참 구원의 성막에 앉을 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앉느냐? ‘정의와 정의를 구함과 의로움에 대한 열정으로입니다. 이정도라면 구원받은 자가 아닐까요? 그런데 이들은 그렇게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모압은 자신이 참교회라고 믿고 있으며 예수님의 보좌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보좌는 구원을 말합니다. 다윗은 구원의 대명사입니다. ‘우리가 있는 여기는 다윗의 보좌가 있어라고 하며 확신이 넘치는 것입니다. 모압은 저 멀리 있는 동네가 아닙니다. 엄청난 확신가운데 있습니다. ‘보좌가 있고 예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애씀이 있어라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가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의 자랑이 헛되도다

우리가 모압의 ‘pride’ ‘교만입니다. 실제로는 안 그런데 그런 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모압입니다. 엄청 확신합니다. 그러니까 전파하죠. 자기가 지옥 간다면 누가 전파하겠습니까? 하다 말죠. 대부분 모압입니다. 그런데 확신이 넘칩니다. 왜일까요? 자신이 구원 안에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받는 은혜가 대단한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압에 있는 자들은 교만해서 대화가 안 됩니다. 교만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교만이 무엇일까요? 회개가 안 되는 것, 애통이 안 되는 것이 교만한 것입니다. 애통이 낮아짐의 메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애통이 없다? 애통이 없어도 잘 산다? 교만한 것입니다. 모압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애통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다 교만합니다. 천국 못 갑니다. 지금은 애통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교만해서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천국이 멀어지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애통할 것을 못 찾습니다. 낮아지면 애통할 것투성입니다. 그래서 계속 울어도 울음이 끝나지 않습니다. 원래부터 겸손은 늘 애통을 줍니다. 겸손 자체가 항상 애통하게 합니다. 안하면 교만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하면 눈물이 마르는 것입니다. 애통이 없습니다. 그런 교만한 사람들이 모압임을 알지 못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he is very proud’ ‘으스대다입니다. ‘pride’는 내가 높다고 믿는 마음이며 ‘proud’는 내가 나은 것을 남에게 으스대는 것입니다. 매우 으스댑니다. ‘내가 말씀을 안다’, ‘내가 찬양을 잘 한다’, ‘내가 기도를 잘 한다라고 으스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거만과 그의 교만과 그의 ‘wrath’ 분노입니다. 분노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우리말로 말하면 혈기입니다. 이들은 거만과 교만과 혈기가 가득 차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lies’ 거짓말이 그렇게 안 될 거라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한 거짓말이죠. 내가 잘났다고 하는 거짓말, 사실 그것은 참 진리가 아닙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거짓말들이 그렇게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압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안에 다윗의 성막이 있는 줄 알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안 된다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그러므로 모압이 모압을 위하여 통곡하되 다 통곡하며 길하레셋 건포도 떡을 위하여 그들이 슬퍼하며 심히 근심하리니

그러므로 모압은 모압을 위하여 howl할 거라는 것입니다. 모압이 모압을 보면 서로 비난하는 것입니다. ‘너도 지옥 갈 운명인데’, ‘저 교만덩어리라고 비난합니다. 서로 비난하면서 서로 ‘howl’ 하는 것입니다. ‘every one’ 모든 자가 ‘howl’ 할 거라는 것입니다. howl은 지옥 간다는 것에 대한 표현이죠. 그들은 드디어 통곡할 것입니다. 지옥 앞에 howl 할 것입니다.

또 길하레셋의 기초에 대하여 너는 애도할거라는 것입니다. 길하레셋은 모압의 수도입니다. 모압의 가장 중심부에 대하여 너희가 애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옥 가는 것에 대한 통곡입니다. ‘surely’ 분명히 그들은 ‘stricken’ 고통 받는다는 것입니다. 비참해한다는 것입니다. 지옥의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비참한 것이죠. 지옥 앞에 고통을 당하니까 애도하는 것입니다.

모압이 지옥 간다고 생각하는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압은 신앙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모압은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모압은 깜깜한 밤이 아니라 그늘처럼 밝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가 모압을 진단내릴 때 지옥으로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압을 지옥으로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이는 헤스본의 밭과 십마의 포도나무가 말랐음이라 전에는 그 가지가 야셀에 미쳐 광야에 이르고 그 싹이 자라서 바다를 건넜더니 이제 열국의 주권자들이 그 좋은 가지를 꺾었도다

이는 헤스본의 밭과 십마의 포도나무가 말랐음이라영적인 세계입니다. 밭이 있는데 거기에 포도나무가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구원에 관계된 나무입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못 맺으면 구원을 못 받는 것입니다. 여기도 포도나무가 있습니다. 땅이 보입니다. 그러나 땅이 황폐한 것입니다. 황폐하면 천국에 못 가는 것입니다. 만약 환상 가운데 황폐하면 그 사람은 지옥입니다. 그 땅은 하나님의 영적인 기회들을 말합니다. 그 기회들을 다 놓치면 천국에 못 가는 것입니다. 여기도 땅이 넓은데 땅에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languish’ 시들고 여위어 가는 것입니다. 열매 없는 신앙입니다. 신앙에 열매가 없습니다.

그리고 ‘heathen’ 이방인의 ‘lords’ 왕들이 거기의 중요한 식물들을 ‘broken down’ 부러뜨리는 것입니다. 모압은 하나님의 세계가 아닙니다.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배드린다고 하나님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일까요? 그 땅을 누가 밟습니까? 그 땅은 이방인의 왕, 마귀가 밟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땅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돌아다니시면 주의 땅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마귀가 돌아다니면 그건 마귀 땅입니다.

모압은 마귀 땅입니다. 모압은 우리의 친구가 아니라 우리의 적들입니다. 그런데 같은 기독교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같은 기독교인데 적입니다.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지옥 가는 목사들,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마귀의 땅입니다. 왜일까요? ‘heathen’ 이방인들의 왕들이 그들의 가지를 부러뜨려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맺으려고 했는데 가지가 부러져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앙이 된 것입니다.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신앙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야셀까지 와서 광야를 돌아다닌다는 것입니다. 또 그들의 가지는 ‘stretched’ 뻗어서 바다를 넘는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가지가 그들에게 와서 그들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들은 열매를 맺을 기회가 없으며 맺을 수 없습니다. 왜일까요? 이방인, 세상 임금, 마귀가 드디어 지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마귀가 지배하게 되어있습니다. 세상에 중간은 없습니다. 신앙이 적당하면 천국 갈까요? 지옥 갈까요? 우리는 천국 가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모압은 지옥 가는 것입니다. 애매한 신앙들, 양다리 신앙들은 천국 못 갑니다. 마귀가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9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야셀의 울음처럼 십마의 포도나무를 위하여 울리라 헤스본이여, 엘르알레여, 내 눈물로 너를 적시리니 너의 여름 실과, 네 농작물에 즐거운 소리가 그쳤음이라

야셀의 ‘weeping’ 울음과 함께 내가 ‘bewail’ 비통해할 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는 이사야입니다. 이사야가 모압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비통해하는 것입니다. 모압은 불신자가 아니라 신앙인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가 아파하고 너무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저 모압이 돌아와야 하는데라고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the vine of Sibmah’ ‘십마의 포도나무입니다. 거기에 포도나무가 심겨졌기 때문입니다. 거기도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었습니다. 그런데 안 되니까 우는 것입니다. 내가 내 눈물로 물을 줄 거라는 것입니다. ‘O Heshbon’ ‘오 헤스본입니다. 헤스본은 모압의 과거 옛적 수도입니다. 길하레셋은 나중 수도이며 헤스본은 원래 수도입니다. 이사야가, 선지자가 헤스본을 위하여 울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모압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때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지옥 가기 때문입니다. 그 눈물을 통해서 그들을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는 것입니다. 우는 이유가 사고가 나거나 병 때문이 아닙니다. 불행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가지, 지옥의 참상 앞에 우는 것입니다. 세상에 망하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닙니다. 큰 문제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지옥이 큰 문제입니다. 오히려 안 되는 것이 복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지옥이 보일 때 우는 것입니다. 저 사람 고쳐달라고, 살려달라고 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사야의 심정입니다.

여름 과일에 대한 ‘shouting’ 외침과 네 추수에 대한 것이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추수가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왜 우느냐? 추수는 구원인데 구원에 도달이 안 된 것이니까 우는 것입니다. 씨는 심겼는데 열매가 없는 신앙들, 모압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스템이 모압에 있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즐거움과 기쁨이 기름진 밭에서 떠났고 포도원에는 노래와 즐거운 소리가 없어지겠고 틀에는 포도를 밟을 사람이 없으리니 이는 내가 즐거운 소리를 그치게 하였음이라

기쁨이 빼앗겼고 그 풍성한 들에 나오는 기쁨이 빼앗긴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포도원에 노래가 없으며 외침도 없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농사지은 영적인 농사들이 다 망해서 더 이상 기쁜 곳이 되지 않습니다. 열매가 없으니까 다 없습니다. 그리고 포도를 밟는 자들이 그들의 포도즙에서 밟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포도즙이 열매인데 즙도 없으니까 당연히 우는 것입니다. 포도가 없어서 즙을 짤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내가 ‘vintage’ 수확기 때 외침을 멈추도록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수확이 없어서 우는 것입니다. 모압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거기는 폼만 있는 신앙인입니다. 모양만 기독교인입니다. 모양만 있고 열매가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서는 그 원하는 수확기의 즐거움이 없습니다. 모압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이 없는 종교, 이단입니다. 그런데 예배는 드립니다. 이단들도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구원이 없는 종교가 된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수금 같이 소리를 발하며 내 창자가 길하레셋을 위하여 그러하도다

오번역입니다. ‘my bowels’ 내 창자가 모압을 위하여 하프 같이 소리를 발한다는 것입니다. 하프는 복음전파입니다. 지옥 가는 신앙인을 위해서 내가 깊은 내면에서부터, 속에서부터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우니까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inward parts’ 깊은 내면에 길하레셋을 위하여 내가 소리를 발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전파의 소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회자를 상대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책을 전하죠. 책에 계명순종의 복음과 죄 사함의 복음과 축사의 복음이 있습니다. 그 모압들이 회개하기 위해서, 참 신앙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압을 향해서 복음을 증거해서 그들이 참된 신앙에 들어오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모압이 그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자기 성소에 나아가서 기도할지라도 소용없으리로다

모압이 그 산당에서’ ‘high place’ ‘예배처입니다. 대부분 예배처는 높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산당, 높은 예배처에서 ‘weary’ 피곤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성소로 기도하러 오는데 그들은 ‘not prevail’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얻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열심히 드립니다. 모압은 예배에 열심입니다. 그런데 뭔가 해결되는 것이 없습니다. 뭔가 이거다하는 것이 없습니다. 끝없는 아쉬움, 끝없는 불편한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데도, 분명히 해결자 하나님을 만났는데도 인생에 해결이 안 납니다. 그래서 마음에 어딘가 불편함이 있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성도님들이 다른 유튜브나 설교를 듣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문제가 해결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해결이 안 났기 때문에 자기 목사님 설교와 다른 목사님 설교를 비교합니다. 그리고 막 듣습니다. 방송설교 보고 은혜를 받습니다. 다 모압입니다. 거기는 진리가 없습니다. 유튜브 설교가 들어오면 이상한 것입니다. 정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비진리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비진리에 있으면 그것이 좋아 보입니다.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있으면 그것이 듣기 싫습니다.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신령한데요?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신령함을 머리로만 보는 것입니다. 지금 이들은 아무리 예배를 드리고 기도해도 피곤하고 안 됩니다. 해결이 안 나는 것입니다. 영혼이 계속 곤고합니다.

 

13절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오래 전부터 모압을 들어 하신 말씀이거니와

내가 지금 이제까지 한 얘기는 지금 한 말이 아니라 ‘since that time’ 어느 때부터 내가 한 말을 지금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성경은 기록 당시 이후에 의미있는 게 아닙니다. 원래 성경은 이미 기록되었습니다. 언제? 창세 때 기록되어 있다고 시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원래 있던 것입니다. 왜냐? 모압도 늘 있어 왔습니다. 모압은 이스라엘 동편에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시적인 동영상이고 그게 아닙니다. 오늘도 항상 영적으로 모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모압은 아담부터 늘 있던 어떤 사람과 어떤 종류를 말합니다. 모압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압은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심판은 모압 국가의 없어짐이 아닙니다. 그런 모압 신앙인들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이런 내용들은 다 이미 존재한 것이며 옛날에도 있던 것들입니다. 롯과 두 딸이 모압을 만든 게 아닙니다. 이미 모압 신앙들이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있던 것을 이제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 때 모세 전에도 말씀이 적용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아브라함이 그 큰 시험을 당하게 되었느냐? 하갈을 데려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14년 동안 안 나타나십니다.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니까 쫓아버리는 것입니다.

법은, 율법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 성경은 영원한 성경이지 모세가 쓴 게 아닙니다. 그 때 당시 하나님의 말씀만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영원합니다. 창세 때부터 재림까지 유효한 것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이후부터 산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느냐? 역시 이 말씀에 따라 산 것입니다. 야곱이 두 종을 데려오죠. 그것도 간음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했다고 해서 그것이 정상이 아닙니다. 분명히 간음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에 나온 인물이라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구약 때도 신약 말씀이 적용되어지는 것입니다. 구약 때도 남에게 음욕을 품으면 그게 똑같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다 똑같습니다. 계시록 마지막 구절도 구약 때 말씀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 성경 말씀은 이미 다 쓰여진 것이며 이미 하나님 마음에 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풀어진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그 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마음에 성경이 있었는데 이미 있는 말씀을 나열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위대한 것입니다. 말씀은 일점일획도 오차가 없으며 기가 막힙니다. 우리가 요즘 신약을 번역 하면서 놀라죠. 한 절하면서 10번 놀랍니다. ‘이런 뜻이었구나하면서 매일 놀랍니다. 한 절을 통해서 이렇게 귀하다니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말씀처럼 귀한 것은 없습니다. 말씀처럼 값진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의대생들이 의사공부하며 법대생들이 법을 공부합니다. 이 땅의 공부를 합니다. 그 공부와 말씀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게임이 안 됩니다.

제가 옛날에 책을 읽다가 책을 덮고 안 읽었습니다. 그 책 한권보다 성경 한절이 더 가치 있는 것입니다. 안 좋은 책 100권보다 성경 몇 절이 훨씬 가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쓸 수 있는 게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너무 귀합니다. 그래서 한 절 한 절, 한 마디 한 마디, 한 단어 한 단어가 되게 귀한 것입니다.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을 쓴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해와 같이 삼 년 내에 모압의 영화와 그 큰 무리가 능욕을 당할지라 그 남은 수가 심히 적어 보잘것없이 되리라 하시도다

‘Within three years, as the years of an hireling’ ‘고용의 해와 같이 3년 안에입니다. 모압이 신앙세계에 고용된 것입니다. 신앙세계에 들어온 것입니다. 고용의 해와 같이 3년 안에 모압의 영광이 대다수의 무리와 함께 ‘contemned’ 경멸받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 많은 무리들이 3년 안에 열매를 못 맺는다는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 고목나무들입니다. 열매 없는 신앙들입니다. 3년이 꼭 3년은 아닙니다. 3년은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입니다. 신앙의 기회들, 그 기회 때에 열매가 맺혀야 하는 것입니다.

열매가 무엇일까요? 내면적인 것입니다. 좋아하게 하는 것, 그것이 열매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좋아해야 합니다. 그것이 열매입니다. 그런데 열매가 떨어졌다?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싫어하면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괜히 마음에 안 들면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에 안 들다가 또 좋아지면 열매가 생기는 것입니다. 열매라는 것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서로 좋아하는 게 있습니다. 그 좋아하는 것에 매력을 느낍니다. 그것이 열매입니다. 누가 나를 생각할 때 기분이 참 좋으면 그것이 열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생각할 때 기분이 안 좋으면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 죄를 짓죠.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야곱입니다. 야곱은 사기적인 기질이 있습니다. 경쟁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야곱을 되게 사랑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열매입니다. 그것이 구원을 주는 것입니다. 나를 좋아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좋아하는 것이고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사랑하면 그게 좋아하는 것입니다. 열매는 예측이 안 되는데 누가 더 열매가 많을까요? 모릅니다. 하나님이 되게 사랑하면 열매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면 열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우리의 느낌과 다릅니다. 때로는 우리가 은혜로워도 하나님께서 안 좋아하시는 경우가 되게 많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예배,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행동, 좋아하는 마음, 이것이 바로 열매가 됩니다. 그런데 이게 없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그 많은 기간을 줘도 열매들을 못 맺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모압이며 고목나무가 되어서 그냥 끝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평생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간 동안에 열매를 맺기 위해서 열심히 땅을 파고 열매를 만들어야 하는데 열매는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는 우리가 보는 것과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를 좋아하고 싫어하시는데 우리는 그 이유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열매 맺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열매를 굉장히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열매는 보이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많이 좋아하면 열매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를 많이 맺으면 그때는 우리가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아까 찬양 가사 가운데 열매가 없으면 아낌없이 찍어서 던지시리라라는 말이 나왔죠. 이것이 모압 신앙입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신앙은 많은데, 받은 은혜는 많은데 열매가 없습니다.

그리고 남은 자는 매우 적을 것이고 약할 거라는 것입니다. 드디어 대다수가 경멸되는데 그래도 드물게 이 중에서도 다시 건짐 받은 자가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물게 다시 또 돌아올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마치겠습니다!


<사복음교회 박경호목사 이사야 강해>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4GospelChurch 박경호목사 이사야 28장 [유대교가 천국으로 인도하는데 실패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천국의 기초돌이 되셔서 다양한 구원의 역사를 나타내 주십니다]

4GospelChurch 박경호 목사 이사야 1장 ['율법=계명+예배'이므로, 계명준수의 실패는 구원상실로 이어집니다]

4GospelChurch 박경호목사 이사야 27장 [세계적고난이 대환란에 일어나며 세상에서 추방된 극소수 마지막 구원자들이 구원상실 직전에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새하늘, 새땅의 영생으로 구원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