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GospelChurch 박경호목사 이사야 28장 [유대교가 천국으로 인도하는데 실패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천국의 기초돌이 되셔서 다양한 구원의 역사를 나타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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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GospelChurch 박경호목사 박경호번역성경  상세정보 보기 &  책 구입하러가기(URL 클릭!) www.4gospelchurchbooks.com   이사야 28 장 [유대교가 천국으로 인도하는데 실패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천국의 기초돌이 되셔서 다양한 구원의 역사를 나타내 주십니다] 1 절입니다 .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 사실 이 선지서는 우리말로 볼 수가 없습니다 . 왜냐하면 이게 너무 오번역이 많기 때문입니다 . ‘woe’ ‘ 화로다 ’ 입니다 . 그러니까 지옥이죠 . 누구냐면 ‘the crown of pride’ ‘ 교만의 면류관에게 ’ 입니다 . 누구냐 ? 에브라임의 술 취한 자들입니다 .   에브라임은 산당이 많은 곳이죠 . 유대에는 성전이 있습니다 . 성전에서만 구원이 존재하지 산당은 사실 구원이 희박한 곳입니다 . 그러니까 산당도 예배처지만 산당 예배는 법궤가 없기 때문에 , 그러니까 구원이 어렵기 때문에 항상 구원은 예루살렘과 유다 쪽으로 나온 것입니다 .   에브라임은 예배를 드리지만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그런 것입니다 . 현재 있는 북이스라엘입니다 . 그래서 이것은 지금 잘못된 예배를 드리는 어떤 사람을 알 수도 있습니다 .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 ‘glorious beauty’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이 ‘fading flower’ 사라지는 , 지는 꽃입니다 .   그들이 영광이 있습니다 . 그 속에도 영광이 있습니다 . 그런데 지는 꽃입니다 . 원래 꽃이 지면 안 됩니다 . 꽃이 지면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 이것은 일시적으로 은혜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 이것이 중요합니다 .   우리가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세계에서도 꽃이 있습니...

4GospelChurch 박경호목사 이사야 17장 [다메섹은 거듭남을 향해 신앙생활하는 영적인 초신자들이며, 영생에 도달될 가능성은, 많으면 1,000명 중 1명 적으면 10만명 중 1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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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17

[다메섹은 거듭남을 향해

신앙생활하는 영적인 초신자들이며,

영생에 도달될 가능성은,

많으면 1,000명 중 1명 적으면

10만명 중 1명입니다]



1절입니다.

다메섹에 관한 경고라 보라 다메섹이 장차 성읍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이라


다메섹이 성에서 ‘taken away’ 제거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ruinous’ 파괴된 ‘heap’ 무더기가 될 거라는 것입니다. 다메섹은 구원에 도달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메섹이 무엇일까요? 다메섹은 지금도 있는 것이며 현재 다마스커스, 시리아, 아람인데 이것이 오늘도 있습니다. 다메섹은 구원을 받지 못한, 거듭나지 못한, 그러나 거듭남을 향해 달려가는 성도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왜 이런 이름들을 가지고 규명하나요? 그것은 성경을 많이 보면 일치되는 내용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왜 사마리아나 북이스라엘은 구원받지 못하고 거듭난 자들이냐? 그것을 많이 읽으면 나오는 것입니다. 신약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 구원이 예루살렘이냐? 그것은 반복적인 내용에 의해서 반복성으로 규정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메섹이 여기에만 있으면 할 말이 없는데 다메섹이 많이 나옵니다. 거기도 마찬가지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달려가는 것이 보여지니까 우리가 다메섹을 거듭남으로 달려가는 성도라고 규명한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봐서 이것이 안 풀린다면 틀린 것인데 다 풀립니다. 제가 블레셋을 원귀신이라고 했죠. 우리 안에서 안 떠나는 영입니다. 그런데 진짜 그렇게 풀면 다 풀립니다. 신기하게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는데 다메섹에 대한 경고는 지금도 있는 것이며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대로 운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사야의 글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글이 아니라면 이사야가 다르고 예레미야가 다르고 다 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합니다. 성경은 누가 쓰더라도 하나로 일치가 됩니다. 그래서 진리입니다. 누가 예언을 해도 똑같은 말입니다. 1600년 동안 42명이 썼는데 어떻게 일치될 수 있을까요? 성경의 저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성령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게 일치가 됩니다. 오늘 다메섹에 대한 내용도 마찬가지로 정말로 거듭남을 향해 달려가는 성도이냐? 이제 가보면 ~’하고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당연히 다메섹은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지옥에 떨어지는 자들입니다. 왜일까요? 천국은 거듭나야 가는 것입니다. 가톨릭은 구원관이 회개이며 칼빈이나 개신교는 구원관이 믿음입니다. 루터교는 믿음+회개입니다. 우리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구원관은 거듭난 자가 거듭남을 통과하고 구원을 통과함이라는 실제적인 것이 있을 때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구원상실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듭남부터 구원 사이에 실족이 존재하며 구원 속에도 구원상실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구원관은 실제 리얼한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방법은 순종이지만 실제 우리의 구원관은 애매하지 않고 정확합니다.

 

믿으면 천국 가이것을 어떻게 증명합니까? 그런데 실제로 거듭남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없으면 우리는 이것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에 거듭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실제 있는 걸 믿는 것이지, 없는 걸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거듭남이 존재하며 구원도 존재합니다. 어떻게 아느냐? 천국에 집이 있으면 구원입니다. 집이 없으면 구원이 아닙니다. 실제 구원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신앙은 애매하고 모호한 신앙이 아니라 명확한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성경은 이 모든 내용들이 다 설명되어 있습니다. 제가 만든 것이 아니라 여기에 이 내용들이 다 써 있습니다. 저는 성경에 있는 내용을 뽑아서 말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다메섹이 나중에 당연히 돌무더기, 다 지옥 가는 자들로써 끝나는 결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아로엘의 성읍들이 버림을 당하리니 양 무리를 치는 곳이 되어 양이 눕되 놀라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원래 아로엘은 모압 지방에 있는 도시입니다. 과연 거기일까요? 아니죠. 여기도 도시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도 거듭남을 향해 달려가는 영혼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느냐? 나중에 버림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양들을 위해 있을 것이며 그들이 누울 거라는 것입니다. 원래 그들은 양, 구원을 위해 존재했던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죠. 거듭남을 위해서 달려가는 것이 왜 존재합니까? 거듭남을 통과하고 구원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양들을 위해 원래 준비된 것들인데 버림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누구도 그들을 두렵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래는 양을 향해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3절입니다.

에브라임의 요새와 다메섹 나라와 아람의 남은 자가 멸절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 같이 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요새 또한 에브라임으로부터 ‘cease’ 중단된다는 것입니다. 이 다메섹에 있는 요새, 신앙이 좋은 사람이 거듭나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 거듭남의 땅입니다. 거듭나지 못하고 그냥 단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kingdom’ 왕국이 다메섹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입니다. 왕국이 구원인데 구원까지 이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remnant of Syria’ 아람의 남은 자입니다. 우리가 거듭남을 향해 달려가다가 믿음을 잃어버리면 세상에 갑니다. 그런데 끝까지 남은 자가 있죠. 남아도 마찬가지로 그 다음 땅인 구원의 왕국과 거듭남의 왕국으로 못 가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멈춰진 것입니다. 1000명이 있으면 900명은 그대로 있고 100명만 거듭난다고 말씀드렸죠. 900명은 있다가도 세상으로 나갑니다. 왜일까요?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영적으로 불신자입니다. 그러니까 있다가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진입이 안 되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데 이스라엘의 자손의 영광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영광을 얻게 되는 거네요? 그게 아니라 당연히 받아야 할 이스라엘의 영광을 못 누리는 자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얻어야 할 영광을 못 누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거기서 거듭났다면, 구원받았다면 올라가는데 못 되고 그 영광을 못 누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4절입니다.

그 날에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그의 살진 몸이 파리하리니

 

그 날에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원래 거듭남을 향해 달려가는 자들이 많아야만 그들이 거듭나고 구원을 얻어서 구원이 늘어나는데 거듭남을 향해 달려가는 교회가 무너졌으니 누가 믿겠습니까? 아이를 많이 낳아야 그 중에 한명이라도 상속을 얻는데 아이를 못 낳는 것입니다. 당연히 야곱의 영광이 쇠해지는 것입니다. 구원은 보통 20년 걸리는데 어린 주일학교가 많을 때는 주일학교가 다메섹이었습니다. ? 아직 그들은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거듭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구원받는 자들이 있는데 이제는 원천적으로 주일학교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영광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다메섹이 있어야합니까, 없어야합니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있어야할까요? 그들이 비록 영적으로는 불신자라 할지라도 그들이 이제 거듭나고 또 구원을 얻게 되는데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다 교회를 떠나면 누가 거듭나고 누가 구원을 얻겠습니까? 그러니까 영광이 쇠하는 것입니다. ‘그의 살진 몸이 파리하리니다메섹의 멸망과 쇠퇴 때문입니다. 다메섹이 비대해야만 북이스라엘이 비대해지는데 원천적으로 출산을 안 하고 애기가 없으니 진짜 목적인 구원의 세계마저도 약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5절입니다.

마치 추수하는 자가 곡식을 거두어 가지고 그의 손으로 이삭을 벤 것 같고 르바임 골짜기에서 이삭을 주운 것 같으리라

 

이것은 추수하는 양이 적은 것입니다. 다메섹이 많으면 구원도 많아지는데 다메섹이 약하고 동시에 다메섹이 많다할지라도 구원이 적음을 말합니다. 제 공식에 의하면 1000명의 신자 가운데 100명 거듭나고 그 중에 10명이 구원받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1명이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도 많은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1000명 교회에서 1명 천국 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정상적인 교회에서입니다. 이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드문 것입니다.

 

6절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주울 것이 남으리니 감람나무를 흔들 때에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과일 두세 개가 남음 같겠고 무성한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네다섯 개가 남음 같으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안에 주울 것이 남으리니사실은 줍는 포도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감람나무를 흔들 때에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과일 두세 개가 남음 같겠고올리브나무가 있는데 몇 백개가 열리죠. 그런데 그렇게 열리는 게 꼭대기에 두어 개 있다는 것입니다. 두어 개, 구원의 숫자입니다. 성경에서 과일은 구원을 말합니다. 구원이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다메섹의 멸망 때문에 더 어려워졌는데 이게 너무 적은 것입니다.

 

무성한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네다섯 개가 남음 같으리라이것은 최종적으로 다메섹을 통과하고 구원에 도달된 자의 숫자입니다. 네다섯 개의 열매입니다. 5천명 모여야 5명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5천명, 그 중에 90%가 다메섹입니다. 거듭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아느냐? 거듭나면 거듭남의 찬양이 나옵니다. 그것이 복음성가입니다. 지금은 복음성가가 거의 없습니다. 복음성가가 없어져버렸습니다. 세계적으로 거듭나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CCM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없으니까 사람들의 영이 사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방 종교를 섬기는 것입니다. 거듭나야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데 못하니까 이방 종교를 섬기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뵙겠고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a man’ 한 사람이 자기의 창조자를 본다는 것입니다. 한명이 누구일까요? 남은 과일입니다. 결국 남은 자 한명이 창조주를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respect’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겨우 한명이 남는 것입니다. 전도서에도 지혜자가 1000명중에 1명 나오죠. 극소수가 남아서 구원에, 영생에 도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8절입니다.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그가 어떻게 도달되었느냐? 인간이 만든 제단에서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 거듭남을 통과하지 못하고 구원에 이르지 못하느냐? 영생을 못 누리느냐?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인위적인 것, 인간적인 것, 하나님이 없는 예배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거듭나지 못하고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명이 누구냐? 어떻게 구원받느냐? 그 사람은 하나님이 만든 제단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지 않은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제단입니다.

 

어떻게 영생에 도달할 수 있느냐? 인간이 만든 것은 결국 인간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이 만든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예수님이 거기 세워져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면 모든 설교와 모든 예배는 무의미합니다. 왜일까요? 믿음을 소유하려고 가지만 참 믿음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야하는데 여기로 가지 못합니다. 무엇을 하면? 인간이 세운 제단, 제단은 교회입니다. 성경에서 제단은 예배처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제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든 제단에 갔는데 이 사람이 영생에 간 것입니다.

 

또한 아세라나 ‘images’ 우상을 만들지 않은 것을 존경한다는 것입니다.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존경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세라나 ‘images’ 상입니다. 아세라는 ‘groves’ 작은 숲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뭘 만드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교회와 예배는 인간을 예배합니다. 우리 인간을 위해 존재합니다. 인간이 듣기 좋은 찬양, 인간의 소원들,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리고 기도도 자기의 꿈을 아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다릅니다. 예배가 나를 위하니까 내가 변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시는데 변화가 안 됩니다. 왜 안 되느냐? 자기를 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겨야하는데 못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예배하면 마음에 갈증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진짜 참 평안을 얻어서 옛날에 얻은 평안이 사실 가짜였습니다. ? 그것은 조그만 모압처럼 그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소원이 사라지고 예수님만 원하는 것입니다. 다른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만 찾는 것입니다. 신앙이 중요하지 딴 게 뭐가 필요합니까? 예수님을 원하게 되고 딴 소원이 없어져버립니다.

 

9절입니다.

그 날에 그 견고한 성읍들이 옛적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버린 바 된 수풀 속의 처소와 작은 산 꼭대기의 처소 같아서 황폐하리니

 

오번역입니다. 그 날에 그의 강한 성들이 버려진 ‘bough’ 가지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견고한 것은 믿음이 좋은 성도입니다. 그런데 거듭나지 못하고 나중에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최종 결론은 버림받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구원을 안 받으면 다 버림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uppermost branch’ 가장 높은 가지조차 버림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남는데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그들이 남겨진 것입니다. 내가 구원이라는 이스라엘 자손에 들어가야 하는데 못 가니까 당연히 버려진 것입니다. 구원에 도달해야 하는데 못 하는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민족이 다른데 다메섹과 이스라엘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데 다메섹은 이스라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을 위해 있는 땅인데 안 되면 그냥 버림받는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나무가 있으면 나무 가운데 높은 큰 가지가 있는데 이것이 다메섹입니다. 그런데 가지가 버림받는 것입니다. 왜 버림받느냐? 목적이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인데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황폐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이라 그러므로 네가 기뻐하는 나무를 심으며 이방의 나무 가지도 이종하는도다

 

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이라그들이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 모였는데 나중에 떠나갑니다. 교회를 다니다가 떠나갑니다. 왜일까요? 거듭나지 못하니까, 구원을 못 받았으니까 떠나가죠. 이유가 무엇이냐? 하나님을 끝까지 마음에 두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구원을 주실 때까지 교회에 붙어있어야 하는데 교회에 있다가 그냥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버려진 것입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며 그게 버림받은 것입니다. 버리면 자기가 나가는 것입니다. 끝까지 붙어있으면 나중에 거듭나게 됩니다. 이 거듭남이라는 것은 시간이 원래 오래 걸립니다. 거듭남은 오세요가 아닙니다. 거듭나기 위해서 말씀과 기도와 예배가 많이 누적되어야 합니다. 거듭남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신앙에서 시작이지만 거듭남도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게 거듭남입니다. 그 때부터 회개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못 견디고 나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기뻐하는 나무를 심으며드디어 이들이 교회를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의 ‘slips’ 조각들과 함께 ‘set’ 다시 세팅된다는 것입니다. 원래 있던 거듭날 수 있는 나무에 붙어있어야 하는데 이탈되어서 이방의 조각에 붙어버린 것입니다. 끝난 것입니다.

 

11절입니다.

네가 심는 날에 울타리를 두르고 아침에 네 씨가 잘 발육하도록 하였으나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농작물이 없어지리라

 

그 날에 너는 네 씨가 잘 자라게 만들 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에 네 씨가 잘 발육하도록 할 것인데 그러나 추수 때, 추수가 ‘a heap’ 무더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heap는 구원받지 못한 자의 상징입니다. ‘네가 잘 자랐어야 되는데 못 자라서 심판 때, 추수 때, 구원 때 무더기로 끝나라는 것입니다.

 

‘in the day’ 언제, 어느 날입니다. ‘grief’ 슬픔과 ‘desperate’ 절망적인 ‘sorrow’ 슬픔의 날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죽는 날입니다. 그 때는 버려지는 것입니다. 제일 잘 자라야 하는데 못 자란 것입니다. 말씀의 씨가 들어가서 열매를 못 맺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다닐 때 이왕 다니는 거 거듭나야 하고 구원받아야 하는데 다니다가 말든지 안 돼서 최종적으로 추수 때 heap가 되어서 죽음의 날이 슬픔과 고통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드디어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게 남은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슬프다 많은 민족이 소동하였으되 바다 파도가 치는 소리 같이 그들이 소동하였고 열방이 충돌하였으되 큰 물이 몰려옴 같이 그들도 충돌하였도다

 

오번역입니다. ‘Woe’ ‘화있다입니다. 화는 지옥으로 인도하는 표현이죠. 누가? 많은 사람들의 대중들입니다. 무서워하는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있다는 것입니다. 바다의 소음과도 같이 그들이 소음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지옥 가는 날 괴성을 지르죠. 지옥은 비명의 장소입니다. 지옥 가면서 비명을 지릅니다. 그래서 물들의, 바다의 소음처럼 큰 소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들의 ‘rushing’ 돌진입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대규모의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도 지옥에 99,999명이 떨어지면 천국에는 한 명이 올라갑니다. 대규모로 다 지옥에 떨어집니다. 대부분의 ‘nations’ 나라들이 지옥으로 돌진하는 것입니다. 또한 능력의 큰 물들의 ‘rushing’ 쇄도처럼 그들이 쇄도한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쇄도하느냐? 지옥으로 돌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Woe’ ‘화있다입니다. 화는 전부 다 지옥에 쓰는 표현입니다. 누구일까요? 다메섹에 있다가 구원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거기서 끝까지 구원에 도달되면 되는데 못 버티고 결국은 떨어지는데 그 수가 너무 많은 것입니다.

 

13절입니다.

열방이 충돌하기를 많은 물이 몰려옴과 같이 하나 주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리니 그들이 멀리 도망함이 산에서 겨가 바람 앞에 흩어짐 같겠고 폭풍 앞에 떠도는 티끌 같을 것이라

 

나라들은 많은 물들의 돌진 같이 돌진한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우리 영을 말합니다. 우리 개인을 나라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하나의 나라입니다. 많은 나라들이 돌진하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rebuke’ 꾸짖고 책망할 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멀리 ‘flee’ 도망한다는 것입니다. 죽을 때 멀리 지옥으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 앞에 도망갑니다.

 

그들은 누구처럼 되느냐? 그들은 바람 앞에 산들의 겨와 같이 쫓긴다는 것입니다. 지옥으로 쫓겨나가는 것입니다. 또 돌풍 회오리바람 앞에 있는 ‘rolling thing’ 회오리치는 것처럼 그냥 쓸려가는 것입니다. 어디로? 지옥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대거 지옥으로 쓸려가고 있죠. 죽으면 다 거의 지옥입니다. 누구입니까? 불신자와 똑같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과거 한 때 교회를 다니면서 회장이나 총무나 집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나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해서 나중에 불신자처럼 끌려가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보라 저녁에 두려움을 당하고 아침이 오기 전에 그들이 없어졌나니 이는 우리를 노략한 자들의 몫이요 우리를 강탈한 자들의 보응이니라

 

‘eveningtide’ 저녁에 고통하고 ‘before the morning’ 아침이 되기 전에 그는 없어져있는 것입니다. 아침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합니다. 이제 현재 자연계가 끝나고 그 때는 영계에서 안 보입니다. 지금은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다시 주님이 재림하신 다음에는 불의 연못이 우리에게 감지가 안 됩니다. ‘he is not’입니다. 이제 없습니다. 이제 불의 연못에 있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교신이 안 됩니다. 지금은 지옥과 낙원과 자연계가 영적으로 통해있지만 그 때는 단절되어버립니다. 그 때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spoil’ 노략질한 자들의 ‘portion’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은 불신자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우리에게 해를 주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자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겠습니까? 당연히 내 영을 상쇄시키고 떨어뜨리게 만듭니다. 비록 교회를 다닌다 할지라도 거듭나지 않은 자는 우리를 힘들게 만듭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안수하면 힘듭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을 통변하거나 안수하면 막 신이 나고 힘이 됩니다. 다릅니다. 불신자는 더 힘듭니다. 마음을 안 엽니다. 그들은 다메섹도 아니고 완전히 이방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큰 짐이 됩니다. 그리고 교회를 다닌다 할지라도 거듭나지 않은 자는 마음을 힘들게 합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이방 지역이 어렵습니다. 영적인 탈진과 영적인 침체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선교하다가 힘든 게 그런 것입니다. 불신자를 상대하는데 그들에게서 오는 영적인 피해가 엄청납니다. 또 교회에 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피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spoil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rob’ 강탈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우리의 믿음을 빼앗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신자,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내 믿음조차 빼앗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경계하고 조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구원상실 되는 것입니다.

 

영은 상호파장을 줍니다. 그래서 불신자와 있으면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신앙이 떨어집니다.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같이 불신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이삭이 나이를 먹었는데도 아브라함은 굳이 리브가를 얻습니다. 그리고 리브가도 자기 아들 야곱을 굳이 거기서 아내를 얻게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안 좋은 사람은 우리를 다운시키는데 우리가 왜 어려움을 당하느냐? 영이라는 게 내가 누구와 어울리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울림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공간 안에 누구와 있느냐?’입니다.

 

심지어 불신자는 내 영을 ‘rob’ 지옥으로 빼앗아 가버립니다. 왜일까요? 누구든지 다 마귀가 안에 있습니다. 신자도 마귀가 있는데 불신자는 어떻겠습니까? 빼앗아갑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는 항상 지혜자 앞에 있어서 같이 win-win하는 것입니다. 다메섹, 이들은 믿음이 있는 모양은 있지만 거듭나지 않은 자들입니다. 이들이 빨리 거듭나서 구원받아야 하는데 못한 자들이 다메섹입니다. 다메섹은 결국 불신자와 함께 하는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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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GospelChurch 박경호목사 이사야 28장 [유대교가 천국으로 인도하는데 실패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천국의 기초돌이 되셔서 다양한 구원의 역사를 나타내 주십니다]

4GospelChurch 박경호목사 이사야 27장 [세계적고난이 대환란에 일어나며 세상에서 추방된 극소수 마지막 구원자들이 구원상실 직전에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새하늘, 새땅의 영생으로 구원됩니다]

4GospelChurch 박경호 목사 이사야 1장 ['율법=계명+예배'이므로, 계명준수의 실패는 구원상실로 이어집니다]